본문 바로가기

헌책49

《개밥풀》 이동순, 창비시선 0024 (1980년 4월) 序詩(서시)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꺾고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날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성난 목소리도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2024. 7. 21.
《트렁크》 김언희, 세계사 (1995년 9월) 아버지의 자장가 이리 온 내 딸아네 두 눈이 어여쁘구나먹음직스럽구나요리 중엔어린 양의 눈알요리가 일품이라더구나 잘 먹었다 착한 딸아후벼 먹힌 눈구멍엔 금작화를심어보고 싶구나 피고름이 질컥여물 줄 필요 없으니, 거좋잖니 ...... 어디 보자, 꽃핀 딸아콧구멍 귓구멍 숨구멍에도 꽃을꽃아주마 아기작 아기작 걸어다니는살아 있는 꽃다발사랑스럽구나 이리 온, 내 딸아아버지의 바다로 가자일렁거리는 저 거대한 물침대에너를 눕혀주마아버지의 바다에, 널잠재워주마 김언희 시인의 시 "아버지의 자장가"는 너무 강렬하고 섬뜩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는 극단적인 이미지와 비유를 통해 왜곡된 사랑과 폭력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이 시는 독자에게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은밀한 폭력과 학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이름으.. 2024. 7. 20.
《숲 속에서》 글·그림 김재홍, 길벗어린이 (2000년) "우리 내일 오디 따러 갈 건데, 같이 갈래?""응, 나도 같이 갈래."메주콩이 조심스레 묻자, 샘이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그럼 내일은 우리 재미있게 놀자?""그럼!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거야!"샘이의 힘찬 대답에 아이들이 환히 웃었어요.아이들이 웃는 얼굴이 달맞이꽃만큼이나 환했어요. 김재홍 선생님은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평소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생각을 꾸주히 펼쳐왔습니다. 아름다운 동강의 숨겨진 모습을 우리들에게 새롭게 보여 준 그림책 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 ~ 하나다"라는 말을 싫어한답니다. "하나"라고 강조되고 나아가서 강요될 때 다양성이 파괴되고 더불어 사는 삶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김재홍 선생님도 자.. 2024. 7. 16.
《조국의 별》 고은, 창비시선 0041 (1984년 7월)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인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로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는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 2024. 7. 6.
《지금 그리운 사람은》 이동순, 창비시선 0057 (1986년 12월) 종다래끼 - 農具(농구) 노래 2 할 수만 있다면싸릿대로 이쁘게 엮은 종다리깨 하나멜빵 달아 어깨에 메거나배에 둘러차고 우리나라의 고운 씨앗을 한가득 담아남천지 북천지 숨가삐 오르내리며풀나무 없는 틈이란 틈마다 씨를 뿌리고철조망 많은 무장지대 비무장지대폭격 연습 한 뒤의 벌겋게 까뭉개진 산허리춤에다온통 종다래끼 거꾸로 쏟아 씨를 부어서저 무서운 마음들을 풀더미 속에 잠재우고도 싶고또 할 수만 있다면짚으로 기름히 엮은 종다래끼 하나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충청도 물고기 담아가서 황해도 시장에 갖다 주고함경도라 백두산 푸른 냄새를 그득그득 담아와서철없는 내 어린것에게 맛보이고 싶어라이남의 물고기 맛고 이북의 풋나물 맛이한가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라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우리나라는 하나여라 하나여라하나여.. 2024. 7. 6.
《넋이야 넋이로다》 하종오, 창비시선 0058 (1986년 11월) 시인굿  가운데에서   어떻게 한 다리 걸치고, 어떤 놈들인지, 내 이승사람이 아니니 저승소리로 한번 훑어볼 테니 들어봐라!   내 문학이 모더니즘의 모범이라 치켜세우면서 제 글도 모더니즘에 한몫을 보려는 놈! 내 문학은 소시민적 갈등 속에서태어난 도덕적 진정성이라면서 거듭 되풀이 주장하는 놈! 내 문학은 도시적 감수성만 있기 때문에 농촌적 정서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고 운명적으로 말하는 놈! 내 문학을 싸움으로 여겨 그 싸움을 또 싸워야 한다는 것을 전부로 알고 기고만장해하는 놈!  모조리 눈 감고 코끼리 다리 애무하고 있으니 내가 저승에선들 편하겠느냐?  그놈들 찬물에 손 씻고 눈 비빌 땐데  찬물에 밥 말아먹는 놈들이 또 있으니  으음 황당하다 내 시에서 난해성만 쏙 빼 제 복잡성으로 버무려, 에에 .. 2024.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