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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가장자리》 백무산, 창비시선 0345 레드카드 스포츠 뉴스에 잠깐 스쳐 지나간 그 심판을 똑똑히 기억할 순 없지만 그가 게임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을 보았다. 열광하던 관중 가운데 존 레넌을 닮은 한 사내가 자지를 내놓고 축구장을 가로질렀다가 경기는 플러그 뽑히듯 중단되고 보다 못한 선수 한명이 달려가 온몸으로 태클을 걸어 그 벌거숭이를 자빠뜨렸을 때 난장판이 된 경기장은 정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심판의 판단은 달랐다 심판은 태클을 건 선수에게 달려가 주저없이 레드카드를 내밀고 퇴장시켜버렸다 골을 얻어맞은 선수가 항의하자 심판은 손가락을 잔뜩 발기시키고 똑똑히 말했다 "당신은 관중을 모독했어!" 심판은 경기의 규칙이 아니라 경기장의 규칙을 지킨 것이다 경기장의 규칙은 관중이 구매한 것이다 조기회 축구가 아니면 관중 없이는 경기도 없다 선.. 2024. 5. 16.
《國土(국토)》 조태일, 창비시선 0002 어머님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호남선 삼등 야간열차로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기념회 때는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山一番地(산일번지)에 오셔서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드릴께,         안탈란다, 알탄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쩌 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1971년 작품. 1968년에 태어난 사람은 조태일 시인의 가 찡하게 .. 2024. 5. 9.
《農舞(농무)》 신경림, 창비시선 0001 農舞(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레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971년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약 3,260만명이었으며, 농촌 인구는 .. 2024. 5. 9.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
《내일의 노래》 고은, 창비시선 101 공룡 20세기는 얼굴로부터사람의 얼굴로부터 시작했다그렇게도 무시무시한 시대였으나우리는뒷골목 여자의 얼굴까지도사람의 얼굴로 살아왔다제국주의반제국주의전쟁과 혁명그리고 파쇼그리고 학살과 착취이런 시대였으나그럴수록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그 20세기가 가고 있다 앞으로는 지난 세기와 다르리라다시 공룡의 시대가 오리라벌써부터 아이들은 공룡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사람의 얼굴은어디로 가는가 사람의 오류야말로사람의 멸망 바로 그것과 안팎인가오 21세기의 화가들이여 "공룡"은 시대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고찰합니다. 시는 20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적인 사건들, 전쟁, 혁명, 학살, 착취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얼굴이 존재하고.. 2024. 5. 1.
《꿈의 페달을 밟고》 최영미, 창비시선 175 그 여름의 어느 하루   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구살, 달걀..... 종이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게 마련이다. 아, 참기름이 떨어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2024.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