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어느 하루
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구살, 달걀..... 종이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게 마련이다. 아, 참기름이 떨어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묵직이 메달린 쇼핑 봉지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웬지 가슴이 뿌듯했다. 근사하게 한상 차려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리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게 틀어놓고 분주히 싱크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선율이 폭포처럼 거실 가득히 쏟아졌다. 아, 어쩌면 이렇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날 밤 요리 준비에 몰두해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으며 나는 알았다. 내가 지금 사랑의 신열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그 달콤한 지옥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의 오랜 불면증이 치유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혹 그 증세가 더 도질지도.....
"그 여름의 어느 하루"는 일상적인 소소한 순간들을 통해 사랑과 행복, 그리고 삶의 복잡한 감정들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인은 주인공이 장을 보고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사소한 순간들이 어떻게 그 사랑과 행복으로 이어지는지를 그립니다.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감정을 느끼며 사소한 고민과 기쁨을 느낍니다. 삶의 소중함과 사랑의 중요성, 불안하지만 달콤한 사랑.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곷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가을,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壁)한 두 세상.
"사랑의 시차"는 사랑의 복잡한 감정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의 갈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는 주인공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시간적인 차이, 주인공은 밤일 때 사랑하는 사람은 낮이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낮일 때 주인공은 캄한 밤입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시간적 차이는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태도에 반영뵙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침이 사랑하는 사람의 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밤이 주인공의 오후를 참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주인공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도 떠나지 않는 백조처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을.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시시한 별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단호하게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는 최영미 시인. "뭣도 모르고 감히 시를 저질렀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서투른 만큼 순수한 첫사랑의 열정으로 한행 한행을 밀고 나갔던 그 시절에 나는 '시란 무엇인가'라고 한번도 묻지 않았었다..... 시는 내게 밥이며 연애이며 정치이며, 그 모든 것들 위에 서 있는 무엇이다. 그래서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시들이여. 세상의 벗들과 적들에게 맛있게 씹히기를.....으자자자작". 으자자자작, 으라차차아..... 앞으로도 계속 최영미 시인의 시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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