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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21

《그 모든 가장자리》 백무산, 창비시선 0345 레드카드 스포츠 뉴스에 잠깐 스쳐 지나간 그 심판을 똑똑히 기억할 순 없지만 그가 게임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을 보았다. 열광하던 관중 가운데 존 레넌을 닮은 한 사내가 자지를 내놓고 축구장을 가로질렀다가 경기는 플러그 뽑히듯 중단되고 보다 못한 선수 한명이 달려가 온몸으로 태클을 걸어 그 벌거숭이를 자빠뜨렸을 때 난장판이 된 경기장은 정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심판의 판단은 달랐다 심판은 태클을 건 선수에게 달려가 주저없이 레드카드를 내밀고 퇴장시켜버렸다 골을 얻어맞은 선수가 항의하자 심판은 손가락을 잔뜩 발기시키고 똑똑히 말했다 "당신은 관중을 모독했어!" 심판은 경기의 규칙이 아니라 경기장의 규칙을 지킨 것이다 경기장의 규칙은 관중이 구매한 것이다 조기회 축구가 아니면 관중 없이는 경기도 없다 선.. 2024. 5. 16.
《國土(국토)》 조태일, 창비시선 0002 어머님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호남선 삼등 야간열차로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기념회 때는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山一番地(산일번지)에 오셔서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드릴께,         안탈란다, 알탄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쩌 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1971년 작품. 1968년에 태어난 사람은 조태일 시인의 가 찡하게 .. 2024. 5. 9.
《農舞(농무)》 신경림, 창비시선 0001 農舞(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레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971년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약 3,260만명이었으며, 농촌 인구는 .. 2024. 5. 9.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창비시선 476 뱁새 시인   수컷은 보폭이 커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알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자꾸 찢어지다보면 겹겹 새살이 돋을 거 아닌감. 그 새살이 고살 거시기도 키우고 가슴팍 근육도 부풀리는 거여.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보면 다리는 어찌 되겄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다리 길어지고 근육 차오르면 날개는 자동으로 커지는 법이여. 뱁새가 황새 되는 거지.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샛과여. 자네 고향이 황새울 아닌가?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들끼리 몰려댕기면 잘해야 때까치여. 그런데 수컷만 그렇겄어. 노래하는 것들은 다 본능적으루다 조류 감별사여. 시란 게 노래 아닌감? 이리 가까이 와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2024. 5. 8.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
《사월에서 오월로》 하종오, 창비시선 43 마음 마음먹은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상계동 골짜기 맑은 물이 되어서부모들 행상 나간 뒤 비탈진 골목에서흙 만지며 노는 아이들 깨끗이 씻어주고 봄날엔 홀연히 많은 고액권이 되어서삭월세 사는 주민들의 전세금으로혹은 너른 땅을 사서 골고루 나눠주어한 채씩 집을 짓게 하고겨울날엔 옷과 밥이 되어따뜻하게 지내게 해주고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전에 오늘밤에는중동취업을 꿈꾸는 남편들에게입사서류가 되어 배달되거나포장마차 마련을 꿈꾸는 아내들에게리어카와 연탄불이 되어 찾아가거나학교 못 다니는 쓸쓸한 소년소녀에게책이 되어 찾아가 공부하게 하고 그러나 마음먹는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한나절 싸우고 우는 아이들에게장난감이 되어 함께 놀다가사랑이 되어 포근히 안아주다가 하종오 시.. 2024.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