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
호남선 삼등 야간열차로
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기념회 때는
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
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
山一番地(산일번지)에 오셔서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드릴께,
안탈란다, 알탄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쩌 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
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1971·한국일보>
1971년 작품. 1968년에 태어난 사람은 조태일 시인의 <어머님 곁에서>가 찡하게 심장을 찔러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어제는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오늘, 그 다음 날, 구순을 향해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11월 23일에 경미한 뇌경색을 겪으셨고, 지난 주에 눈 파킨슨병 검사도 받으셨지만 다행히 아니라고 하여 안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와 뇌경색으로 인한 수두증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나 심각하지 않다는 말에 우려와 안도가 교차했습니다. 돌아오는길에 장기요양등급을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사람이란 짐승 참 복잡하고 간사하기도 하지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은 여러ㄹ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오셨기에, 남은 여생은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눈물 찔금 나누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으면 합니다.
보리밥
건방지고 대창처럼 꼿꼿하던
푸른 수염도 말끔히 잘리우고
어리석게도 꺼멓게 익어 버린 보리밥아
무엇이 그렇게도 언짢고 ㅇ니꼬와서
나를 닮은 얼굴을 하고
끼리끼리 붙어서
불만의 살갗을 그렇게도 예쁘게 비비냐
무릎을 끓고 허리도 꺽어
하염없이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너는 너무도 엄숙해서
농담은 코 끝에서 간지러움으로 피고
가슴 속엔 더운 북풍이 인다.
너희들이 쾅쾅 칠 땅은 없고
바람 끝에나 매달리면 어울릴 땀을
다 뒤집어 쓰고 나더러는
고추장이나 돼라 하고 나더러는
아무 데서나 펄럭일 깃발이나 돼라 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위에
갈기갈기 찢겨 널리던 바람처럼
활발하게 살아라 하느냐
멍청한 보리밥아
똑똑한 보리밥아
<1969·한국일보>
가난의 상징이었던 보리밥이 건강의 상징이 되었으니.....
간추린 日記(일기)
이승만 할아버지 초상화에
누님이 바르는 연지를 찍어 발랐더니
새 색씨가 됐더라고 말하던 동무와,
눈 내리는 영산강을 스케취한 것은
1950년 일이고,
한라산 허리에 불붙던 소월의 진달래 꽃이며
한라산을 가벼운 날개만으로도 흥분시키던 매미를 잡으며
백록담에서 멱을 감은 것은
1960년 안개 속에서이고,
두개골 속에서 귀신 옷갈아 입는 듯한
피리 소리가 늘 들려 자칭 낮도깨비라 하는 친구외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지르던 것은
1961년 핏속에서이고,
정사를 한 오빠와 아무개여인의 시체 곁에서
사랑만세를 불렀더니 느닷없이 속이 후련한
웃음과 기침이 뛰쳐나와 얼떨떨했다는
의사 지망생인 여학생과 만난 것은
1964년 가을길 위에서이고
파랑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詩(시)>라고 쓴 동그라미 깃발을
광개토대왕비 곁에 나란히 꽂고
내 유서를 20년쯤 앞당겨 쓸 일은
1999년 9월 9일 이전 일이고.....
<1968·新春詩(신춘시)>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문단 등단. 1999년 9월 7일 간암으로 졸. 시인은 1968년 저 시를 쓸 때 31년 두 정말 9월 9일 이전에 본인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을까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60년 4.19 혁며, 1961년 5.16 쿠테타, 1964년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개인의 삷과 역사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할까요? 시인이 꿈꾼 1999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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