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舞(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레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971·창작과 비평>
1971년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약 3,260만명이었으며, 농촌 인구는 약 1,56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0%를 차지했습니다. 2024년 총인구는 약 5,184만명이고 농촌인구는 1,000만명 아래로 떨어져서 943만명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경림의 시 <농무>는 어려운 농촌의 환경과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로 이주하는 농촌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 어느 마을에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들이 있을까요.
동행
그 여자는 열살 난 딸 애기를 했다
그 신고 싶어하는 흰 운동화와
도시락 대신 싸 가는 고구마 애기를 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왔다
명아주 깔린 주막집 마당은 돌가루가 하얗고
나는 화장품을 파는 그 여자를 향해
실실 해픈 웃음을 웃었다
몸에 벤 그 여자의 비린내를 나는 몰랐다
어물전 그 가난 속에 얽힌 애기를 나는 몰랐다
느린 벽시계가 세 시를 치면
자다 일어난 밤대거리들이 지분댔다
활석 광산 아래 마을에는
아침부터 비가 오고
우리는 어느새 동행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그러나 우리는 서로 묻지 않았다
<1973·世代(세대)>
그녀의 고단한 삶,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지를 묻지 않은 채 함께 걸어 가고 잇/습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幼兒(유아)
1
창 밖에 눈이 쌓이는 것을 내어다보며 그는
귀엽고 신비롭다는 눈짓을한다. 손을 흔든다.
어린 나무가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던 몸짓이 이러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까닭을, 또 거기서 아름다운 속삭임들이 들리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충만해 있는 한 개의 강물이다.
2
얼마가 지나면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그가
엄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다.
꽃, 나무, 별,
이렇게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배워 가면서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 하나 잃어버린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그는 완전한 한 사람이 되다.
3
그리하여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이면 그는
어느 소녀의 생각에 괴로와도 하리라.
냇가를 거닐면서
스스로를 향한 향수에 울로 있으리라.
<1957·文學藝術(문학예술)>
어쩌겠어요. 아가는 소녀로 소녀는 처녀로 처녀는 엄마로, 꼭 엄마가 아니어도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냇가를 거닐면서 향수에 눈물 대신에 엷은웃음을 나누며 앞으로 걸어 나아가길....
그 겨울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금방앗간
그 아랫말 마차집 사랑채에
우리는 쌀 너 말씩에 밥을 붙였다.
연상도 덕대도 명일 쇠러 가 없고
절벽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은 지겨워
종일 참나무불 쇠화로를 끼고 앉아
제천 역전 앞 하숙집에서 만난
영자라던 그 어린 갈보 애가를 했다.
때로는 과부집으로 몰려가
외상 돼지 도토리에 한 몫 끼었다.
진눈깨비가 더욱 기승ㅇㄹ 부리는 보름께면
객지로 돈벌이 갔던 마차집 손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와 그를 위해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지만
그 술판은 이내 싸움판으로 변했다.
부락 청년들과 한산 인부들은
서로 패를 갈라 주먹을 휘두르고
박치기를 하고 그릇을 내던졌다.
이 못난 짓은 오래 가지는 않아
이내 뉘우치고 울음을 터뜨리고
새 술판을 차려 육자배기로 돌렸다.
그러다 주먹들을 부르쥐고 밖으로 나오면
식모살이들을 가 처녀 하나 남지 않은
골짜기 광산 부락은 그대로 칠흑이었다.
쓰러지고 엎어지면서 우리들은
노래를 불러댔다. 개가 짖고 닭이
울어도 겁나지 않는 첫 새벽
진눈깨비는 이제 함박눈으로 바뀌고
산비탈길은 빙판이 져 미끄러웠다.
<1972·月刊中央(월간중앙)>
창비시선 1 <농무>는 1975년 3월 5일 세상에 나왔습니다. 2024년 4월에는 500번째 시집이 나왔으니, 무려 49년,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다른 행성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오래되지 않은 오래된 우리말들. 오십년 전 우리말과 오십년 뒤의 우리말들 서로 섞이며 신나게 웃고 떠들고 술레잡기도 하고 숨박꼭질도 합니다. 때때로 시대 정신에 벗어난 낱말들,싯구들이라고 비판도 받아야하겠지만 당대의 수준이었고 이제 우리의 문화 유산입니다.
>< 2024년 5월 22일 수요일 영면에 드셨습니다. 향면 89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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