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이 두려운가 봅니다. 복숭아나무가 지닌 복잡한 내면의 세계, 즉 '너무도 여럽 겹의 마음'을 의식하며 그런 사람의 마음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멀리서만 지나쳤던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자연과 교감을 통해 평화와 안식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사람뿐만 아리라,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이와 다양성을 지닌 존재들을 이해하과 교감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한 편의 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上弦(상현)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은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이 존재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일까요? 우리의 신도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나 봅니다.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신이 잠시 머문 자라마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변화를 일으켰나 봅니다. 시인은 새벽녘 능선에 걸친 상현달을 보고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죄를 깨긋이 씻어낸 이시야를 느꼈나 봅니다.
* 상현(上弦): 삭이 지난 뒤 지구와 태양, 지구와 달을 잇는 직선이 직각이 되어 달의 서쪽 절반을 볼 수 있게 되는 시기 혹은 그 현상. 상현달은 해가 진 후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지만, 사실상으로서는 한낮에도 관찰이 가능하다. (위키피디아)
(왼쪽: 위키피디이, 오른쪽: GPT4)
일곱 살 때의 독서
제 빛남의 무게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 그날 밤
하늘의 누수는 시작되었다 하늘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은 울컥울컥 쏟아져
우리의 잠자리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전갈의 붉은 심장이
깜박깜박 울던 초여름밤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 어느 집터에서, 지붕도 바닥도 없이
블록 몇장이 바람을 막아주던 차가운 모래
위에서 킬킬거리며, 담요를 밀고 당기다 잠이 들었다
모래와 하늘, 그토록 확실한 바닥과 천장이
우리의 짐를 에워싸다니, 나는 하늘이 달아날까봐
몇번이나 선잠이 깨어 그 거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 밤 파도와 함께 밤하늘을
다 읽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하늘의 한 페이지를 훔쳤다는 걸,
그 한 페이지를 어느 책갈피에 끼워넣었는지를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교감하고 소통하였던 어린 시절의 여름밤. 하늘의 별들이 무너지듯 그리고 별똥별이 떨어지던 그 여름 밤하늘, 그 밤하늘을 훔쳐 내면 깊이 어느 책갈피에 끼워넣었습니다.
이 시집을 읽었을 그 누구, 그 누구는 "일곱 살 때의 독서" 윗 모서리를 왜 접어 두었을까? 아마 이 모서리를 접을 때 그도 그 여름 밤하늘을 자신의 영과 마음 속 깊이 어느 책갈피에 끼워넣었을텐데.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십년 후의 나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이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엔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의 여자가
서른다섯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마라 짐승이 된 것 같아요, 라고
또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으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드로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저도 오늘 십년 뒤 저에게 한통의 긴편지를 써보려고요.....
"피의 맛을 본 자는 더이상 빛나는 물과 뜨거운 꿀을 먹고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끌로델의 말처럼,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 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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