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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슬픔이 택배로 왔다》 정호승, 창비시선 482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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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기도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주세요

저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지만 올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올해도 저를 쓰러뜨려주세요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이제 아오니

올해도 저를 거침없이 쓰러뜨려주세요

그렇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주소서

 

올해도 저를 분노에 떨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게 해주세요

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주소서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2024년 5월의 봄, 겨울 가고 다시 봄. 진즉 읽었어야 할 시를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작년 11월 23일 이후로 개인적 일로 바쁘게 연말연시를 보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여름이 오려고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시작할 때입니다. 망설이고 주저하지 말고 시작해보지요. 인생의 제 2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고 3과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너무 쫓기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시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 주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도록 해주시고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김밥을 먹으며

 

서울행 막차를 기다리며

동대구역 대합실 구석에 앉아 김밥을 먹는다

김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무지라고

단무지가 없으면 김밥은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다고

밤눈 내리는 동대구역 창밖을 바라본다

노숙자 사내가 말없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내주고 김밥 한줄을 건네며

꾸역꾸역 물도 없이 김밥을 먹는

한때 농부였다는 그의 서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한때 노숙의 시인이었다고

노숙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하려다가 거짓에 목이 메인다

누구는 보리수 아래에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한벌로

평생 부족함 없이 사신다는데

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지닌 게 없다고

오늘 살고 있는 집보다 내일 살아야 할 집 때문에

더 춥고 배가 고프다고

처음 만난 노숙자끼리 말 없는 말을 나누며

우걱우걱 다정히 김밥을 나눠 먹는다

기다리는 기차는 아직 오지않고

대합실 창가에는 눈발만 흩날린다

 

인간 내면의 허기와 불안,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노숙자일까?

 

 

마지막 순간

 

당신을 만난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인 줄 알지 못하고

 

당신을 포옹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포개져 힘차게

봄비처럼 부드럽게 뛰는

마지막 순간인 줄 알지 못하고

 

당신이 건네는 맑은 미소와

내 손을 잡고 나누는 따스한 감사와 평안이

백매화로 피어나는 지금 이 순간이

당신과 나의 마지막 순간인 줄 알지 못하고

 

해가 저물어도 내일 다시 해가 뜨듯이

내일 다시 당신을 만나리라 굳게 믿었던

내일은 사라지고

 

당신의 장례식장을 찾아가 꽃을 바친다

그 때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밥을 먹고 차를 나누며 사랑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고

 

내일을 너무나도 당연시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 내일이 오지 않는 일들이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항상 남의 일이라고 여기며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발생했을 때 비로소 그충격에 무너지곤 합니다. 내일은 오늘이 있은 다음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소중함을 잊지 마셔요.

 

 

단체 사진

 

봄날에 사진을 정리하다가

젊은 날 찍은 단체 사진을 보고

반갑게 웃다가 울었다

여덟명이 나란히 웃으면서

서로 잘난 척 함께 찍은 사진 속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계단 위에 서서 서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단체로 어디로 간 것일까

밥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당구장에 당구라도 치러 간 것일까

삼류 극장에 영화 구경이라도 간 것일까

나만 외로이 두고

늙은 나한테 사진만 남기고

어느 별로 여행을 떠난 것일까

이제 단체 사진을 다시 찍기 위해

그들을 빨리 찾으러 가야겠다

굳이 꽃이 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래, "다음에 소주 한잔 하자", "다음에 식사 한번 하자", "다음에 보자" 이런 말을 멀리하자. 스마트폰이나 자그마한 수첩을 꺼내 날짜를 맞추어 보고 몇 일 몇 시에 만날 건지 약속을 잡으셔요.

 

"이 시대의 시를 쓰는 일은 외롭고 배고픈 일이다. 그렇지만 시를 떠나 살 수 없는 게 지금까지 내 삶의 현실이자 본질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내 시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시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내가 살아온 이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인간과 자연과 사물의 현상을 항상 나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를 쓰라는 약언(藥言)으로 여겨져 가슴 깊이 새긴다." -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