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 시인
수컷은 보폭이 커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알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자꾸 찢어지다보면 겹겹 새살이 돋을 거 아닌감. 그 새살이 고살 거시기도 키우고 가슴팍 근육도 부풀리는 거여.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보면 다리는 어찌 되겄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다리 길어지고 근육 차오르면 날개는 자동으로 커지는 법이여. 뱁새가 황새 되는 거지.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샛과여. 자네 고향이 황새울 아닌가?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들끼리 몰려댕기면 잘해야 때까치여. 그런데 수컷만 그렇겄어. 노래하는 것들은 다 본능적으루다 조류 감별사여. 시란 게 노래 아닌감? 이리 가까이 와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시 창작에는 물리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시인은 이 고단한 창작 과정을 통해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성장을 격려합니다. 시 창작은 자신을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보다 넓은 세계와의 연결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외면적 세계를 풍부하게 합니다.그나저나 시인 양반, 어여 이리 가까이 와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등
암만 가려워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첫애 업었을 때
아기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새근새근 새털 같은 콧김으로
내 젖은 흙을 말리던 곳이다
아기가 자라
어딘가에서 홧김을 내뿜을 때마다
등짝은오그라드는 것이다
까치발을 딛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손차양하고 멀리 내다본다
오래도록 햇살을 업어보지만
얼음이 잡히는 북쪽 언덕이 있다
언 입술 오물거리는
약숟가락만 한 응달이 있다
등 그곳 오른손과 왼손이 마주칠까 말까하는 그 지점, 어머니의 아픈 사랑이 머문 곳. 아가 엄마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자구나. 2024년 5월 8일 어버이날......그 약숟가락만한 응달 어머니 건강하셔요.
그럴 때가 있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버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난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큰 변화를, 이 지구별에 어떤 큰 변화를 가져오겠지요. 순간, 이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오겠지요.
꼬마 선생님
바닷가에 있는
초락초등학교에 다녀욌습니다
전교생과 병설 유치원 어린이와 조리원과
선생님들까지 열일곱명이 모였습니다.
도서실에서 동시도 읽고 수다도 떨었습니다.
열린 문으로 떠돌이 개가 들어오고
수탉 울음소리도 맞장구쳤습니다.
첫눈이 무장 쌓이는 날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문 뒤로 아이가 숨는 게 보였습니다.
고둥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조개 캐러 나간 할머니가 곧 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꼭 쥐고 있던 토막 연필을 내게 주었습니다.
무지개빛 지우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막막함과 슬픔이 묻어뜯겨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새것이에요.
고맙다. 나에게 주는 거니?
이걸로 재미난 글을 써주세요.
눈보라 속에서 아이의 하나뿐인 가족이
함박눈을 지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외톨이 늙은 개가 운동장을 질러 달렸습니다.
선생님, 잘 쓰겠습니다.
나는 갓 등단한 어린 작가가 되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고드름처럼 울었습니다.
"원고지는 입이 이백개다. 혀는 빙산의 일각, 얼음에 갇혀 있다. 질문과 파문! 얼음 속에서라도 질문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파멸이 아니다. 답은 하나다. 앞뒤가 아니라, 옆이다. 당신 곁이다." - 이정록
꼬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시인이여, 재미난 글을 써주셔요. 당신 곁엔 많은 독자들이 있으니까요. 물론 '원고지는 입이 백개다'라는 말을 모르는 독자들도 많겠지만. 그리고 그 꼬마 선생님은 무럭무럭 씩씩하게 그 마음을 키워나가며 삶의 시인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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