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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49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0118 (1992년 5월) 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초라한 남녀는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일금 이 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이 있다네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한 벗은젖은 알몸들이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또 좀 불우해서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인의 '불우한 악기'는 삶의 불우함과 고독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에 젖은 남녀가 서로 기.. 2024. 10. 20.
《잊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공주 백과사전》 글 필립 르쉐르메이에르, 그림 레베카 도트르메르, 옮김 김희정, 청어람미디어 (2008년 1월) 두꺼비들 공주를 아세요?재스민 공주는 벌써 본 적 있으세요?어두운 저녁나절에 밤의 공주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나요?루이젯뜨 또또 공주와 수다를 떨거나멋쟁이 줄루 공주나 집시 공주가 모닥불 가에서춤추는 걸 지켜본 적도 있나요?반의반달 공주, 도레미 공주, 중국 하루살이 공주.이 밖에도 궁궐 깊은 곳이나 탑 꼭대기에 몸을 꽁꽁 숨긴 공주들은 셀 수 없이 많답니다.너무나도 잘 숨은 탓에 어떤 공주들은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지내기도 합니다.하지만, 그녀들은 다시 찾아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자, 그래서 이렇게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알려지지 않은, 이름조차 사라져 버린 공주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궁궐의 비밀, 복도를 떠도는 소리, 공주방의 은밀한 속삭임, 마법의 숲,숨바꼭질. 동물 친구들.이.. 2024. 10. 19.
《새벽 들》 고재종, 창비시선 0079 (1989년 9월) 마늘싹 -농사일지 4 춘분날아직 햇살 차고 바람도 찬 날매화꽃 환한 텃밭의 지푸라기 걷어내니송곳처럼 언 땅을 뚫은마늘싹들의 예리함이여솟아라 솟아라 마늘싹들의 서늘함이여지난 겨울 내내신경통으로 우시더니 벌써머리에 수건 쓰고 마늘밭에 앉으신 어머니랑결코 한번의 겨울로 끝나지 않는삶이랑역사랑. 노오란 병아리를 여남은 마리나 데불고암탉도 마늘밭에 나선다. 고재종 시인의 시 '마늘싹'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춘분날, 아직 차가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마늘싹. 그 마늘싹처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처럼 강인한 생명력. 겨우내 신경통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봄이 오자 다시 밭으로 나섭니다. 마치 마늘싹처럼 .. 2024. 10. 15.
《케리티 이야기가 있는 집》 아니크 르 레이 글,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김현아 옮김, 한울림어린이 (2004년 4월) 나타나엘은 계단에 앉아서 '비밀의 방' 손잡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요."왁! 깜짝 놀랐지?"누나 안젤리카는 나타나엘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으며 말했어요."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가 너에게 책을 읽어 줄까?"나타나엘은 낮잠을 자기 전에 할머니가 책 읽어 주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할머니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타나엘은 코끼리들이 모여서 춤추는 정글에 가 있곤 했지요.책을 다 읽었을 때쯤 나타나엘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어요."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하지 마! 이 바보 멍청아!""아무리 그래도 할머니는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이제 너는 글을 배워야 해."물론 나타나엘도 글을 읽을 줄은 알아요. 하지만 늘 자신이 없었어요. 나타나엘과 안젤리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2024. 10. 13.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은봉, 창비시선 0078 (1989년 9월) 한강 한강은 흐른다 마구 튀어오르는온갖 잡동사니, 썩어 문드러진 서울의불빛을 감싸며 한강은죽음의 찌꺼기를 궁정동의 총성을실어 나른다 토막난 나라그 남쪽의 노동과 밥과 꿈오월의 한숨과 피울음을개거품처럼 주억거리며 한강은흐른다 차마 그냥 말 수는 없다는 듯이몸뚱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밀려가는 버스와 트럭과 택시와그렇게 질주하는 눈물을 껴안으며살해당한 대통령과 그의 처첩들오오, 환상의 미래와 지난 시대를실어 나른다 무수한 굴욕과 저항의 나날을묻어버린다 그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않겠냐며천천히 더러는 빨리숱한 희망과 변절의 역사를집어삼킨다 그러나 한강은 끝내남아서 지킨다 우리의 죽음 뒤우리의 자식이 남아서 우리를 지키듯이이 땅의 핍박과 치욕의 응어리를급기야 해방의 함성을, 그 아픔을기쁨을 지킨다 혼자서 더러는 .. 2024. 10. 5.
《고척동의 밤》 유종순, 창비시선 0071 (1988년 9월) 식구 생각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통곡하듯 무너져내린 어둠속 정말 견디기 힘든100촉 백열전등 희뿌연 불면을 밀어내고아물지 않은 상처들 위로 포근하게 들려옵니다 누군가 손톱 빠지는 아픔으로 밤새도록 갉아대던 벽하얀 새 되어 날던 꿈마저 시름시름 앓아 누운 벽저 반역의 벽을 뚫고나지막이 따사롭게 들려옵니다 야단치는 형수님의 앙칼진 목소리야단맞는 조카놈의 울음소리허허거리는 형님의 웃음소리자식 그리운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어머니작은 우리들의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었읍니까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벽 밖에도 벽 속에도 온통 벽뿐인 저 절망의 벽과 마주서서오늘도 이렇게 작은 사랑의 소리에 귀기울이며큰 사랑을 꿈꾸고 있읍니다  면회 한 달에 단 하루그것도 단 5분간의 만남을 위해허구헌날 이 생각 저 .. 2024.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