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싹 -농사일지 4
춘분날
아직 햇살 차고 바람도 찬 날
매화꽃 환한 텃밭의 지푸라기 걷어내니
송곳처럼 언 땅을 뚫은
마늘싹들의 예리함이여
솟아라 솟아라 마늘싹들의 서늘함이여
지난 겨울 내내
신경통으로 우시더니 벌써
머리에 수건 쓰고 마늘밭에 앉으신 어머니랑
결코 한번의 겨울로 끝나지 않는
삶이랑
역사랑.
노오란 병아리를 여남은 마리나 데불고
암탉도 마늘밭에 나선다.
고재종 시인의 시 '마늘싹'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춘분날, 아직 차가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마늘싹. 그 마늘싹처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처럼 강인한 생명력. 겨우내 신경통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봄이 오자 다시 밭으로 나섭니다. 마치 마늘싹처럼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여정. 어머니와 마늘싹, 둘 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또한 노란 병아리들과 암탉이 마늘밭에 나서는 모습에서 새 생명의 탄생과 자연의 순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자연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삶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시골의 평온한 풍경 속에서 가족과 자연이 함께하는 순박하고 정겨운 삶. 이 시는 삶의 고통과 끈질긴 생명력을 이야기합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틔우는 마늘처럼, 고단한 삶 속에서도 사람은 늘 끊임없이 새로움을 맞이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침종 - 농사일지 5
그 드세던 꽃샘바람 재우고
오늘 마당가에 살구꽃 새하얀 봄
청명도 쾌청명하매
햇살 한번 오지게 맑아 볍씨를 담근다.
백발 한한 아버지 함께
소금물 풀어 쭉정이 먼지 띄워내고
소독제 풀어 살풍 살균 처리하여
깊고 푸른 샘물 길어 함지박 가득 부으니
저 샛노란 낱알들의 싱그런 웅성거림이다
저 튼실한 낱알들의 눈부신 침잠이다.
"모름지기 볍씨는 날 좋은 날 담궈야제
저렇듯 하늘의 맑은 정기며
청청한 햇살 가득 받아 싱싱한 싹 틔워햐제."
아버지는 솔솔 마파람결에
그윽한 한 말씀 띄우고, 나는 역시
봄은 장꽝에도 햇간장 맑게 우러나는 봄
봄은 문전에도 보리밭 푸르게 짙어오는 봄.
고재종 시인의 '침종'은 봄날의 평온한 농촌 풍경과 생명의 시작을 잔잔하게 그려냅니다. 꽃샘바람이 잦아들고, 살구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에 볍씨를 담그는 모습이 정겹고 소박하게 펼쳐집니다. 청명한 하늘 아래,아버지의 지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볍싸를 담그는 과정은 그 자체로 생명을 준비하는 일로 다가옵니다. 볍씨를 소금물에 담가 쭉정이를 골라내고, 깨끗한 샘물로 살균 처리하는 과정은 단순한 농사일을 넘어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준비입니다. 샛노란 볍씨들의 웅성거림은 생명의 시작을 전하며, 튼실한 볍씨가 눈부시게 잠기는 모습은 앞으로 싹을 틔울 강한 생명력을 예고합니다. "날 좋은 날 담궈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단순한 농사 지식을 넘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와 경험을 담고있습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윽하고 든든하게 그려집니다. 봄은 단순히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일 뿐만 아니라, 시골 마을에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시간입니다. 시는 볍씨를 담그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한 알 한 알의 볍씨가 생명을 준비하듯, 자연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삶을 느낍니다.
텃밭에서의 하루 - 농사일지 20
사나흘 전에 배추씨 무우씨 뿌렸더니
오늘 처서날 아침 싱싱한 햇살에
그 먼지톨만한 씨들이 올망졸망
코딱지만한 푸른 떡잎을 피웠다 신기롭다
아침 이슬 깨끗이 깨고
맑은 햇살 쟁쟁한 아침
빠알갛게 먼저 익은 고추 따서
멍석 가득 널었다 엄니 입이 함박만하다
그뿐인가 그뿐인가 오후엔
지난번 베어 말려둔 참깻단 떠니
그 깨알같은 깨알이 깨알깨알 쏟아지매
아내가 장꽝 맨드라미처럼 웃는 게 곱다
사립 너머 멀리
면사무소 지붕 위의 올림픽기 휘날리고
예의 확성기에선 올림픽노래 울려퍼져도
우리의 기쁨은 화려한 데
시끄런 데 있지 않고
노상 가슴 설레고 가슴 뿌듯한 이 일
씨뿌리고 거두는 일에 하루해 뜨고 진다.
고재종 시인의 '텃밭에서의 하루'는 일상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기쁨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배추씨와 무씨를 뿌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 씨앗들이 푸른 떡잎을 틔우는 모습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시작입니다. 햇살 아래 자라나는 작은 생명들이 시인에게 소소한 기쁘게 선사합니다. 아침 이슬이 사라지고, 고추를 따서 널어두는 모습에 어머니의 환한 웃음이 텃밭의 더없이 평화롭게 만듭니다. 참깻단을 털어내며 아내의 웃음이 피어나는 모습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따스함을 더욱 깊이 느낍니다. 작은 깨알들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소소한 기쁨입니다. 한편, 올림픽의 화려함과 멀리서 들려오지만, 시인의 기쁨은 텃밭에서의 하루에 있습니다. 시끄럽거나 화려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시인은 가슴 속 깊은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이 시는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도 깊은 행복을 찾고, 그 평화로운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며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보여줍니다.
낫질 - 농사일지 21
맑은 가을볕 온 들에 훤하다.
또 한 해 가뭄 장마 병충해 다 이기고
품앗이 이웃들 함께 나락 베는 날.
우리의 눈물처럼 애틋이 타오르는
논두렁의 방울방울 들국꽃이 새하얀하고
산들산들 산들바람은 지극히 불어
땀에 젖는 우리의 피로를 말끔 씻는다.
그렇다, 지난 봄 여름 그토록 허덕여
우리 오늘 오진 나락깍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날렵히 나락 베는 이 기쁨은
날갯짓 세찬 새 되어 하늘 깊숙이 치솟는다.
가을볕 너무 맑아 차라리 서러운데
추수도 전에 나온 영농자금상환서며
막내 공납금 걱정에 어머니는
지레 구시렁거리는 소리로 한나절이지만
마음 더욱 그래도 뿌듯하고 든든한 것은
막걸리잔 서로 돌리는 이웃들의 넉살과
들 가득 울려퍼지는 노랫가락 소리들,
낫질을 한다, 우두둑거리는 뼈마디 세우며
천 날 만 날 빛과 허기에 지친 우리 농사꾼
슬픔도 노염도 일으키며 낫질을 한다.
베는 게 나락만이 아닌 이 독한 그리움으로
날랜 낫질도 날렵히 나락 베는 날,
앞산 뒷산 사방의 단풍드는 나뭇잎들은
저 노랗고 붉은 박수갈채를 끝없이 쳐대고
맑은 가을볕은 더욱 맑아 온 날을 닦아
저기 저렇게 하늘도 천년으로 시퍼렇다.
고재종 시인의 '낫질'은 가을의 수확 풍경과 농부들의 고단함과 기쁨을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맑은 가을볕 아래, 이웃들과 함께 나락을 베는 농촌의 모습은 힘겨운 농사 끝에서 맛보는 소소한 기쁨입니다. 들판 가득 퍼지는 들국꽃의 하얀 꽃잎과 산들바람은 그들의 피로를 씻어주 듯, 고된 하루에 작은 위로를 건넵니다. 지난 봄과 여름 동안 가뭄과 병충해를 이겨내고 맞이한 이 날은 단순한 수확이 아닌 노동의 결실입니다. 나락을 벨 때마다 느껴지는 벅찬 기쁨은 새가 하늘 높이 치솟듯 가볍고 활기찹니다. 그러나 그 기쁨 속에도, 영농자금 상환서와 공납금에 대한 걱정이 스며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웃들과 나누는 막걸리잔과 들판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마음을 따뜻하게 녹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농사일을 넘어 삶의 무게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락을 베는 농부들의 손 속에는 고단함과 염원이 깊게 담겨있습니다. 자연도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듯, 노랗고 붉은 단풍잎들이 박수갈채로 응원합니다. '낫질'은 고된 농사일 속에서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삶의 한 순간을 담백하고 정감 있게 그려냅니다. 맑은 가을볕 아래 농부들은 고단함과 염원을 함께 베어내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이 땅엔
1
아직도 이 땅엔
가슴 가득히 정겨운 것이 있다
밀감빛 창호문에 어리는 저기
둥게둥게 새끼를 얼리는 모습이 있다
이 땅에서 지지리 못나 흙 파는 죄밖에 안 짓는
한 지아비 지어미가 들에서 늦게 돌아와
제 새끼 얼리며 흘리는 맑은 웃음소리가 있다
토방엔 흙내도 흐들히 번지고
마당가 살구나무는 새하얀 꽃등을 단 봄밤에
저기 저렇게 익어가는 조선의 희망,
저기 저렇게 세월의 때를 삭이며
왠지 서럽고 뜨건 눈물을 일깨우는
자그마한 평화의 뿌리가 있다
2
아직도 이 땅엔
해맑은 것들이 있다
저기 하얀 물때 낀 조약돌들
그만그만하게 반짝이는 오월 냇가에
김칫거리며 빨래를 함께 씻는
동네 아낙들의 손등만큼이나 새하얀 것들
저들의 흰 이빨 빛나는 웃음소리만큼 맑은 것들
저들의 젖불은 가슴을 싱싱하게 감아드는
푸르른 바람자락 같은 것들
푸르른 햇살 같은 것들
고재종 시인의 '아직도 이 땅엔'은 소박한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평화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시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정겨움과 따뜻함이 남아 있는 이 땅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밀감빛 창호문에 어리는 새끼를 얼리는 부모의 모습, 그리고 들에서 돌아와 제 아이를 안고 웃는 소리는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평화의 장면입니다. 토방에 흐드러지게 번지는 흙내와 살구나무 꽃이 피는 봄밤, 그 속에서 익어가는 희망이 느껴집니다. 비록 삶이 고단하고 세월의 때가 묻어가도, 그 안에는 여전히 작은 평화와 희망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도 깊은 감동과 따뜻함이 묻어납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함께하는 아낙들, 그들의 손등처럼 하얗게 빛나는 웃음과 평화가 시 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김칫거리와 빨래를 함께하며 나누는 소박한 기쁨은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순수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푸르른 바람과 햇살처럼, 그들의 일상은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느낌을 전합니다. '아직도 이 땅엔'은 비록 고된 삶 속에서도 희망과 평화, 그리고 소박한 기쁨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맑은 웃음과 정겨움은 우리의 마음에 따뜻함을 선사합니다. 시는 소소한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감동을 담담하면서도 정겹게 그려냅니다.
"나는 나의 시가 그렇게 말로 떡을 해서 전조선을 먹이기보단 농부로서의 피울음 속으로 삭혀 한 알의 쌀이 되는 시가 되길 늘 바란다. 그럼에도 나 또한 그 '허황한 말'에서 항상 자유롭지 못하다. 역시 아직도 진정한 삶의 실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홍수와 태풍이 지나간 비참한 들녘에 벼들을 다시 그 푸르른 허리를 일으킨다. 그 의지가 노상 눈물겹다."
* "1992. 2. 8 첫나들이 종로서적에서", 그 종로서적도 문을 닫았고 이 글을 남긴 이는 이 지구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그 첫나들이의 감격을 때때로 함께 하며, 그리고 삶의 첫나들이들 감사하묘 살아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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