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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고척동의 밤》 유종순, 창비시선 0071 (1988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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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생각

 

어머니

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통곡하듯 무너져내린 어둠속 정말 견디기 힘든

100촉 백열전등 희뿌연 불면을 밀어내고

아물지 않은 상처들 위로 포근하게 들려옵니다

 

누군가 손톱 빠지는 아픔으로 밤새도록 갉아대던 벽

하얀 새 되어 날던 꿈마저 시름시름 앓아 누운 벽

저 반역의 벽을 뚫고

나지막이 따사롭게 들려옵니다

 

야단치는 형수님의 앙칼진 목소리

야단맞는 조카놈의 울음소리

허허거리는 형님의 웃음소리

자식 그리운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

어머니

작은 우리들의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었읍니까

 

어머니

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벽 밖에도 벽 속에도 온통 벽뿐인 저 절망의 벽과 마주서서

오늘도 이렇게 작은 사랑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큰 사랑을 꿈꾸고 있읍니다

 

 

면회

 

한 달에 단 하루

그것도 단 5분간의 만남을 위해

허구헌날 이 생각 저 생각

머리를 싸고 또 싸매 꼭 해야 할 이야기들을 찾아

이사짐 싸듯 꼭꼭 싸서

머리속에 쑥쑥 밀어넣지만

 

막상

면회실 유리벽 너머

집사람의 젖은 눈망울만 보면

그 하고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해야 할 이야기들이 생각나지 않아 환장하겠는 것을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조차 떠오르지 않아 미치겠는 것을

낸들 어이하랴

집사람 따라

내 눈도 덩달아 축축해지는 것 같고

목구멍도 가슴팍도 콱 메어져버리는 것을

낸들 정말 어이하랴

 

사람이 갇히면 몸뿐이 아니라

정신도 이렇듯 멍청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내가 멍청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결코 내 탓이 아니다 그것은

저놈의 높디높은 벽 때문이다

아니다 벽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저놈의 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더 팔팔하게 살아나서

내 정신을 온통 휘저어대는 그놈의

자유 바로 그 자유 때문이다

 

 

그대, 슬픈 자유에게

 

내 진실로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와의 달콤하고 황홀한 순간들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 거리의 화사함에 쫓겨나

이 골목 저 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 어둡게 버려진

그대 슬픔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핏자국 땀자국 군화자국 선연한 채

보석처럼 타오르는 그대 슬픔의 영롱함을

차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사춘기 시절

무지개로만 피어오르던 그대 모습은

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대 이제는

어둠에 지쳐 초라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한 점 바람에도 휘청거리기만 하는데

그래도 내 진실로 그대의 모두를 받아들임은

그대가 내게 속삭여준 새벽이

남 모르게 내 가슴 속에서 남 모르게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밤이면 밤마다 슬픔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그대를 꼬옥 껴안고

내 이렇게 미치도록 슬픈 그대를 사랑한다고 속삭임은

슬픔은 절망이 아니라

빛 그 찬란한 승리를 향한 단 하나의 무기라는 것을

그대를 사랑한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서울 예수

 

산동네 공터에서

매일 밤 그이는 바라본다

 

하루의 땀과 피곤을 씻는 수도물소리와

싸움박질 소리와 욕소리와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울음소리와

가난보다 더 독한 소주에 검붉게 달아오른

한 무리 야근 행렬들의 거친 목소리들이

산동네 공터로 정답게 몰려들 때

 

그이는 바라본다 가깝고도 먼

산 아래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요사스럽게 돌아오르는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복과 천국을 향한 정신질환의

기도와 노랫소리가 넘쳐흐르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진리도 덩달아

입안에서만 달콤하게 넘쳐흐르고

넘쳐흐르는 열기만큼 쌓이는 지폐 다발에 미쳐

밤이면 밤마다 붉은 혀 날름거리며 돋아오르는

수천 수만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그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찌든 얼굴들은

허울좋은 도시계획에 밀려 이렇게

산꼭대기로 쫓겨와 한숨보따리를 풀어놓고

이젠 그이마저도

거칠고 무거웠지만 투명했던 삶의 십자가를 빼앗긴채

부드럽고 매끄럽고 향기로운 티크나무 십자가에

이탈리아산 대리석 인테리어에

금도금 은도금 보석장식 장신구에 곤충 표본처럼 박혀

결코 살아날 수 없는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 십자가 뾰족지붕 아래에선 하루 종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고만을 가르칠 뿐

이 척박한 땅 팍팍한 삶 속에서 어떻게

지 애비와 에미가 사랑으로 만나 어떻게

자기를 낳아 키웠는지 가르치질 않는다

간혹

동정과 재미와 사교와 심심풀이의 그럴 듯한 사랑으로

이곳 산동네까지 헌옷가지와 라면상자를 들고 올라와

단 5분 동안 가슴 아파하다가 돌아갈 뿐이다

 

산동네 공터에서

그이는 그 모두를 바라본다

멀기만 한 도시의 불빛과

쉬지 않고 붉은 혀 날름거리는 네온의 십자가와

그것들이 이루어놓은

위선과 거짓과 타락과 기만의 휘황찬란한 그 모든 삶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절망뿐인 그 모두를

그이는 매일 밤 바라본다

 

 

定設(정설)

 

우리들은 보통

별 네 개 대장 출신을 보통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병장 제대 예비군훈련장의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보통사람이라 부른다

 

우리들은 보통

시위 현장 구타와 연행의 도사인 헬멧 쓴 경찰을 백골단이라 부르고

군인을 군바리라 부르고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을 허가증 있는 도둑놈이라 부른다

 

우리들은 보통

미국사람들을 양놈 혹은 코쟁이라 부르고

일본사람들을 왜놈 혹은 쪽발이라 부르고

머리에 털이 없는 사람을 대머리라 부르고

턱이 긴 사람을 주걱턱이라 부르고

거짓말 잘하는 사람을 노가리라 부른다

 

또 우리들은 보통

이승만, 박정희, 아민, 셀라시에, 마르코스 같은 사람들을 독재자라 부르고

군인들이 총칼로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독재하면 군부독재라 부르고

5·16, 12·12, 5·17 등을 군사쿠테타라 부르고

동학 4·19 등을 혁명이라 부른다

우리들은 보통 그렇게 부른다

 

 

"이 시집ㅇ[ 실리 시들의 반 정도는 대학시절과 교도소 수감시절 저와 제 주위의 편린들이고 나머지는 주로 분주히 활동하던 85년에서 88년 사이의 거의 메모에 가까운 거친 글들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나약하고 부끄러운 글들이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지껏 살아온 제 모습 그대로를 내보이고 채찍질 받아야 하겠기에 솔직하게 제 삶을 고백한다는 의미로서 지난 10년의 제 세월을 정리해보았읍니다. 이제는 정말로 시를 써야겠읍니다. 제 생활과 활동의 한 몫으로서 시를 챙겨야겠읍니다."

 

유종순 시인은 1986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 복간호를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그는 버마(미얀마)의 민주화에 관심 가진 작가들과 함께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 '버마사랑' 등을 결성해 매년 버마 문인들을 초청하여 문화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유요비'라는 필명으로 대중음악에 평론 활동을 해왔습니다. <북토피아 웹진>, 월간 <법무사저널>, <통일샘>, 월간 <인권연대>, <시민의 신문> 등에 세계 저항 음악을 연재하면서 '오월가'의 원곡이 미셀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임을 밝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