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깊고 고요한 밤입니다
고요함이 풀벌레 울음소리를
물결무늬 한가운데로 빨아들이는 밤입니다
적묵의 벌판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고인
어둠을 성찰하게 하여주소서
내가 그러하듯 온전하지 못한 이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어제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니 도덕이 단두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
비수를 몸 곳곳에 품고 다니는 그림자들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관용은 조롱당하고
계율은 모두를 최고 형량으로 단죄해야 한다 외치고 있습니다
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
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면죄는 없습니다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우리 안의 깊은 곳도
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내려올 때 있고
해 뜨는 쪽과 멀어져 그늘질 때 있고
캄캄해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모두가 내 안의 늪으로 흘러와 고입니다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도종환 시인의 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은 고요한 밤 속에서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깊은 묵상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의식을 직면하고, 점점 더 공격적이고 잔혹해지는 현실을 인식하며 시작됩니다. 특히, 타인에 대한 관용이 사라지고 도덕이 단죄의 도구로 전락하는 시대의 풍경을 묘사하며, 인간이 내면의 어두운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상황을 그립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타인이 지옥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고, 그 안에 고인 어둠을 성찰함으로써 내적인 평화를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이 시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마주함으로써 진정한 평화와 관용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의재(四宜齋)
잿빛 구름에 가려
은빛 해 보이지 않는다
비릿한 바람에 산발한 머리카락 어지럽다
장기곶으로 갔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온 지
여러달이 흘렀다
권역을 지키지 못한 죄가 크다
대왕의 개혁 권력이 무너진 뒤 정국은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다
선왕은 다시 만나지 못할 분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위리안치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참담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욕되지만
생갹을 담백하게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며
다시 과묵해야겠다
다시 진중해야겠다
수구 주류와 외척 정치에 끈을 대려는 이들이
나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상소를 다투어 올리고 있다 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도 무겁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무겁다
난제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보자
대왕의 장례가 끝났으니
나도 이미 죽은 것이라 여기자
열망이 앞섰던 지난 생애에 곡하고
여기 이 유배지 행랑채애서 다시 시작하자
종자보다 중요한 게 흙의 힘이라는
주막집 안주인 말은 의미가 깊고 크다
이 누옥의 곤궁한 처소를 사의재라 부르자
기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의 목록을 정리하자
태풍이 지나간 뒤 다시 또 태풍이 몰려올 듯싶다
바람의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받아들이자
몰려오는 거센 바람의 거친 보복과
사나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침착하게 그것들을 대면하자
2024년, 나라의 법과 제도가 흔들리고 수구 주류와 선출되지 않은 자의 권력 농단과 그 외척 횡포, 그리고 그들에게 끈을 대려는 이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쁘리재 흔들며 훼손하는 시절. 도종환 시인의 시 '사의재'는 조선시대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의 심정을 그리며, 2024년의 현실과 내면의 갈등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외로움과 절망, 그리고무력함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각오와 의지를 다짐합니다. 이 시는 고난과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사명을 찾으려는 굳건한 결심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강인함을 드러냅니다.
※ 사의재: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와 처음 4년간 머문 공간으로, '네 가지(생각과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대림(待臨)
밤새 겨울비 내리고 있습니다
화선지에 먹이 스미듯 사방을 둘러싼 어둠은 비에 젖다가
유리창에 와 녹아내리는데
서재에는 보랏빛 초가 타고 있습니다
초가 다 타서 엷은 빛으로 몸 바꾸며
여린 분홍이 될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는 대림의 시간입니다
어제는 아침 점심도 굶은 아버지와 열두살 아들이 함께
우유 두 팩과 사과 몇개를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눈물 뚝뚝 흘리는 병든 아버지를
경찰관이 식당으로 데려가 국밥을 사주었습니다
지나가다 이 모습 지켜보던 이웃이
이십만원이 든 돈봉투를
식탁에 놓고 갔습니다
아들이 돌려주려고 봉투 들고 쫓아갔지만
그냥 가져가라며 뛰어갔습니다
집에는 늙은 어머니와 일곱살 아들도 있다는데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면서
경찰관은 눈물을 글썽였는데
그걸 지켜보던 나도 눈물이 났습니다
당신도 그 식당 근처에 계셨는지요
기다림의 초가 다 타면
다시 뉘우침의 초에 불을 붙이고
회개의 촛불을
눈물의 초
사랑과 연민의 초에 나누어 불붙이는 동안
촛불이 몸을 숙여 저기들끼리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당신도 겨울비에 젖으며 저희에게 오십니까
여러날을 굶어 핼쑥해진 어린 아들을 지켜보는
병든 아버지의 낡고 침침한 방에도 오십니까
저녁이 오는 하늘을 말없이 올려다보는 쌩한 퀭한 노모의
부스스한 회색머리칼 옆에도 오십니까
당신의 옷자락에서 시작한 미세한 바람에
지금 촛불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오늘 밤도 당신 어머님은
이 세상에 당신이 오실 곳을 찾지 못해
뷸 꺼진 낡은 집 주위를 서성이고 있습니까
눈발 치는 빈 농막 안을 기웃거리고 있습니까
때론 공연히 크고 높던 내 목소리를
이 밤 촛불 옆에 내려놓습니다
깊이 고개 숙이고 오래 눈을 감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대림'에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우유와 사과를 훔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현실과, 그들을 도운 경찰관과 이웃의 따뜻한 행위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결핍,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과 연민이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그들 곁에 머물며 연민과 사랑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굶거나 치료받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를 갖춘 사회를 만들어야 겠지요.
https://www.nocutnews.co.kr/news/5259193
이단
크리스마스 즈음 역촌시장 열린선원에서
예수님 오신 날 축하 법회가 열렸고
'예수보살과 육바라밀'이란 설교가 있었다
육바라밀 수행에서 보시(布施)가 제일 먼저인데
예수는 조건없이 나누어주라 했으니 재시(財施)요
진리를 설하여 선한 뿌리가 자라게 했으니 법시(法施)요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니 무외시(無畏施)라
계명을 지키고 어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명을 긍정하고 실천하게 하였으니 지계(持契)한 것이며
온갖 모욕과 배신을 이겨내고 역경을 참아냈으며
순경(順境)에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쳤다
성내지 아니하고 온유한 것이 사랑이니
인욕(忍辱) 중에 유순인(柔順忍)에 이르러야
사랑이라 가르친 것이다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 마음으로 깨어 기도하라
잠들지 말라 그분이 온다 하며 정진(精進)하길 요구했고
광야에서 사십일 홀로 기도하며
망념과 삿된 생각과 헛된 마음과 분별지를 버러
선정(禪定)에 들었으니
다섯가지 바라밀을 행한 것이며
천상과 지상
사람과 하느님
죽음과 영원한 삶의 이치 밝게 꿰뚫어보는
깊은 지혜 만났으니 반야(般若)에 이른 것 아닌가
예수야말로 육바라밀을 실천한 보살이다
이렇게 설법한 교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대학에서
해직된 채 찬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고 다녔는데
교단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단 혐의를 벗기까지
몇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054976.html
고마운 일 2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어려울 때마다 상의할 사람 있다는 것
아직도 마음이 뜨겁다는 것
간절할 때마다 달려갈 곳 있다는 것
아직도 별을 우러러본다는 것
외로울 때마다 바라볼 곳 있다는 것
시인의 말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사월의 꽃들이 묻습니다.
대답을 준비하는 동안 모여든 생각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져 쌓입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오월의 나무들도 묻습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쌓인 고뇌의 흔적들을 우선 시로 먼저 내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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