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라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딩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까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몬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년 첫새벽에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2102.html
아침 예배
1986년 9월 7일 오전 열한시
언제 들어도 구수하기만 한 송해의 휘어잡는 너스레에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은 날개를 쳐 한빛교회로 날아가 당신 옆에 앉는다
어느 여직공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김경영 장로의 목회기도에
아 ____ 맨을 한다
남자 친구 있으세요
내달이면 결혼인걸요
중매결혼인가요 연애결혼인가요
중매결혼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연애결혼이랄 것도 없어요 어느 날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외로운 네 눈이 부딪치며 같이 살기로 했어요 서로 위로하며 힘이 되는 거죠 뭐
송해의 목소리가 갑자기 숙연해진다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자 마당이 떠나가게 박수소리가 터져나온다
나는 눈이 화끈해잔다
설교하는 유목사의 얼굴을 쳐다본다
한풀 기가 꺾였던 송해의 너스레가 억지를 부리고
여기저기서 빈 웃음소리가 울려나오는데
저 멀리 뒤에서
푸른 바다 깊은 바다 불붙는 바다 춤을 추며
그 시뻘건 가슴에서 희디하얀 말씀 하늘과 땅에 울려퍼진다
내 큰 마음을 받아라
내 뜨거운 마음 받아라
내 자유를 받아라
우리는 다 같이 일어서서
밀려 나가야 한다
저 깊은 바다를 향해
하늘과 땅 맞닿아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밤새 죽어 쓰러져 있다가 아침만 되면
꿈틀꿈틀 일어나 앉아 눈을 빛내던 방이란다
인재근의 고운 얼굴 어른거리지 않았더라면
해파리처럼 풀어지고 말았을 몸
죽음을 깔아뭉개며 아침마다 되살아나던
근태의 방이란다
동댕이쳐진 신념 손톱 끝에만은 남아 있어
곤두박히는 나락을 쥐어뜽으며 기어오르던
서울구치소 병사 9호실
근태의 방이란다
1986년 5월 31일 토요일 근태를 이감시키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새로 말끔히 페인트칠을 했다지만
어쩌리오 창문 틀에 남아 있는 근태의 손톱자죽을
철창에서 풍겨오는 그의 입김을
철장 너머 푸른 하늘에서 웃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두 눈을
눈만 감으면 나는
바람으로 풀어져 울며 울며 펄럭인다
근태가 휘두르던 깃발로
민중의 깃발로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8430
이소선 여사
어머니
물 좀 물 좀 하는 아들의
타는 목에 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구요
정말 너무하셨군요
하늘을 쳐다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바람이 불어도 눈이 와도
오직 타는 가슴일 뿐인 당신
이소선 여사
우리 어머니
온몸으로 타는 이 조국 위에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알몸으로 뛰어나가고 싶으실 텐데
타는 목에도
셋째아들 종먼의 타는 목에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못하셨군요
억울한 빈소에 메아리치는
당신의 아우성
확확 불을 뿜는데
당신의 목이 타는 건 통 모르시네요
넷째 다섯째 열째 스무째 아들
딸 아들 딸 수없는 아들딸들의
타는 목에 아직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못하여
당신의 목에서는 불이 이는데
청계천 구정물을 바가지로 퍼마셔도 꺼지지 않을 불이
그 불길에 서러운 바가지로 퍼마셔도 꺼지지 않을 불이
그 불길에 서러운 낙엽들마저 불춤을 추는데
그 불길에 백두산 천지마저 부글부글 끓는데
이소선 여사여
가엾은 가엾은 우리의 어머니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우리 모두 모두의 어머니
입을 앙다물고 눈물을 참아온
멍든 가슴들
상처투성이인 손가락들이
잘려나간 손가락들이
아우성치며 모여와
한 방울 한 방울
당신의 타는 목을 축여드릴 그날까지
당신은 오직 타고 있으리
타고 있어야 하리
박종만 열사 빈소에서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0243.html
우리는 호수랍니다
하늘에선 찬란하기만 하던 별들도
우리의 가슴 속에 내려와선
서로 쳐다보며 서러워지는
우리는 호수랍니다
배고픈 설움으로
남의 배고픈 설움에 서로 눈물짓는
가녀린 마음들
방울방울로 솟아나고 흐르고 모여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우리는 호수랍니다
그믐밥 풀벌레 소리 들으며
서러워지건 별들
풀이파리에 이슬로 맺혔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뚝뚝 떨어져 땅속으로 스며
실낱 같은 사랑으로 어울려
하늘처럼 맑은 우리는
호수랍니다
통일꾼의 노래 1
1985년 설날
예순일곱이 되는 아들
예순여섯이 되는 며느리의
세배를 받으시며
아흔이 되시는 아버지
아흔하나가 되시는 어머니
이젠 너희들 통일꾼이 되라 하신다
1989년 2월 18일
아버지는 네 살에
독립군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는 다섯 살에
동학군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하루에 두만강 얼음판을 건너셨는데
이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고
반 장님 반 귀머거리로
환갑 진갑 다 지난 아들 며느리에게 얹혀 사시면서도
마음만은 더욱 푸르러 더욱 뜨거워
갈라져 피 흘리는 조국 생각하는 마음
이대로는 눈감을 수 없어
이젠 우리더러 통일꾼아 되라신다
원산 함흠 희령을 거쳐
눈보라 휘몰아치는 북간도 용정 새장거리에 서서
조선독립만세
조선통일만새
목이 터지게 부르다가 쓰러지는 게
마지막 소원이시란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들어라
백두산 줄기 우릉우릉 울리는 마음으로
압록강 두만강 흑흑 흐느끼는 피눈물로
사십 년 분단 슬퍼하는 겨래 앞에
무릎 꿇고 맹세한다
그 소원 겨레의 소원 내 소원이라고
열번 죽어도 스무번 죽어도
이 소원 이루고야 말리라고
이 소원 못 이루느니
차라리 날벼락 맞아 죽을 거라고
거룩한 이 땅에 묻히는 걸
거절할 거라고
고문의 달인도 조작의 달인도 당당한 나라......
남북이 곧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듯한 시절. 목사님이 살아 계셨으면 그래도 통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고 앞장서셨겠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꾸밈없고 솔직한 글을 통해 진정한 소통을 이루고, 위로와 공감을 주는 것이 좋은 글쓰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한자어를 쓰지 않아도, 아름다운 우리말, 순수한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셨죠 . 쉽고 명확한 소통, 자연스럽고 따듯한 표현 그리고 글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한글 말입니다. 문 목사님의 시를 읽다 보면, 한글로 참 쉽고 편하게 썼구나 하며 또 다른 감동과 감명을 받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249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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