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마시기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기까지는
꽤나 긴 연습이 필요하다.
독작이 제일이라던
어느 작가의 생각이 떠오른다.
외로워서 마시고
반가워서 마시고
섭섭해서
사랑해서
그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
혼자 마시는 술이
제일 맛이 있단다.
빗소리 간간히 뿌리면
더욱 간절하다 한다.
생각하며 마실 수 있고
인생론과 대할 수 있고
아무튼 혼자서 마시는 맛
그것에 젖기까지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들깨꽃
돌멩이 골라내어
두어 평 밭을 일구다
들깨 모종을 하다
아기 손바닥만하게
건강하게 자라서
잎 사이사이
꽃자루에 다닥 피어
보일 듯 말 듯 부는 바람에
안간힘쓰다
작아서 부끄러운가
더러는 일찍 그늘에 숨다
이 꽃보다
우리는 얼마나 작아 보이나
아직은 따가운 햇볕
공터 언저리
하얀 들깨꽃
잔잔한 외로움.
무지재
둠벙에서
긴 대나무 끝에 매달은 낚시로
붕어새끼 몇 마리 잡다가
납작한 초가 한 채
그곳으로 달려가 비를 피했다.
억수같던 비는 걷히고
세수한 얼굴로 다가서는 앞산
그 너머로 무지개가 섰다
일곱 빛깔의 황홀.
그 무지개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전파상 추녀 밑에서
도시에 내리는 비를 피하여
흘러간 옛노래에서
문득 그날이 그립다.
비릿한 그날의 냄새
황홀했던 무지개는 없고
자라지 못한 꿈이
아스팔트 위에서
탁탁 물방울을 튕기고 있다.
立冬(입동)의 시
땀 흘린 만큼 거두게 하소서
손에 쥐게 하소서
들판엔
노적가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주먹을 펴게 하소서
찬바람이 지나갑니다
뒤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살아 있다는
여유를 가르쳐주소서
떨리는 마음에
불을 지펴주소서
남은 해는 짧습니다
후회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수녀 Cecilia에게
젊어서 수녀가 된
아끼던 사람들이
연민의 눈을 보내고 있었지
그 틈에 나도 끼여 있었다.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
주소가 바뀌어
늦게사 받아 본
그 속에는
지난 가을
우연히 오빠 시집 폈다가
눈감으니 눈물이 맺히던걸요
시를 붙들고 살아온 나도
아직 남에게 눈물을 못 주고 있는데
나늘 대산해
시 한 구절 써놓았다.
그 짤막한 몇 마디
한눈에 전부 들어와도
다는 읽을 수 없구나.
이제는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조용히 눈을 크게 떠야지.
"혹은 너무 조급하게 서둔다거나, 혹은 익기 전에 열먀를 따려고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닌지 조용히 자경도 해본다. 과일나무는 꽃이 빈약하다. 색깔이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크고 탐스런 열매를 매달아준다.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겸허 ..... "
임강빈 시인(1931 ~ 2016)은 1956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정한모, 박목월, 김춘수, 서정주 시인의 작품을 좋아했고, 김구영, 박용래, 한성기, 최원규, 나태주 등과 자주 어울리며 술과 문학과 삶을 나누었습니다. 충남과 대전의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작하면서 김용재, 김영훈, 리헌석, 전영관, 홍희표 등 뛰어난 문인들을 배출하며 향토 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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