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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74

《잠든 사람과의 통화》 김민지, 창비시선 0509 (2024년 9월) 너의 전체는 이렇다 한 아이의 손끝 수수깡과 이쑤시개로 만든집실로폰 채 끝에 그려 넣은 얼굴 돔과 같은 마음둥근 천장을 향해 던지는 공 직선으로 뻗지 않고허공을 하산하는 중력 김민지 시인의 시 '너의 전체는 이렇다'는 단순한 표현 속에서 아이의 세계와 삶의 흐름을 담당하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수수깡과 이쑤시개로 만든 집'은 아이가 손끝으로 창조해내는 작은 세계를 상징합니다. 소박한 재료로도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습은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그 의미는 무한히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돔과 같은 마음'과 '둥근 천장을 향해 던지는 공'은 아이의 둥글고 포근한 마음을 연상시킵니다. 직선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아이의 세계는  경계가 없이 확장되며, 상상력과 호기심이 닿는 곳이라면 어.. 2024. 11. 8.
《수옥》 박소란, 창비시선 0504 (2024년 6월) 티타임 '위에서 물 떨어져요'메모를 발견하면서 문득 고개를 젖히면서 알게 된 것 같습니다천장에 번진 얼룩, 어느 겁 많은 눈에서 난 눈물처럼잊고 지낸 나를 떠올리게 된 것 같습니다 위험해요 어서 자리를 피해요!다급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찾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셨을 뿐인데차는 금세 식어버리고 어디서 냉기가 흘러든 건지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어서, 어서, 무섭지만 조금은 다정한 것도 같습니다이토록 염려해주시다니고맙습니다 중얼거리면서얼룩은 아까보다 커져 있습니다 점점 더 커지겠는데 점점 더 어두워지겠는데바깥 풍경은지도에도 없는 해안선을 그리고부서진 자갈과 모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실어 보냅니다 바다는 내내 잠잠합니다 물에 대해 언제고 닥칠 약속에 대해 생각하면서 얌전히 기다릴 수.. 2024. 11. 5.
《새벽 들》 고재종, 창비시선 0079 (1989년 9월) 마늘싹 -농사일지 4 춘분날아직 햇살 차고 바람도 찬 날매화꽃 환한 텃밭의 지푸라기 걷어내니송곳처럼 언 땅을 뚫은마늘싹들의 예리함이여솟아라 솟아라 마늘싹들의 서늘함이여지난 겨울 내내신경통으로 우시더니 벌써머리에 수건 쓰고 마늘밭에 앉으신 어머니랑결코 한번의 겨울로 끝나지 않는삶이랑역사랑. 노오란 병아리를 여남은 마리나 데불고암탉도 마늘밭에 나선다. 고재종 시인의 시 '마늘싹'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춘분날, 아직 차가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마늘싹. 그 마늘싹처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처럼 강인한 생명력. 겨우내 신경통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봄이 오자 다시 밭으로 나섭니다. 마치 마늘싹처럼 .. 2024. 10. 15.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은봉, 창비시선 0078 (1989년 9월) 한강 한강은 흐른다 마구 튀어오르는온갖 잡동사니, 썩어 문드러진 서울의불빛을 감싸며 한강은죽음의 찌꺼기를 궁정동의 총성을실어 나른다 토막난 나라그 남쪽의 노동과 밥과 꿈오월의 한숨과 피울음을개거품처럼 주억거리며 한강은흐른다 차마 그냥 말 수는 없다는 듯이몸뚱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밀려가는 버스와 트럭과 택시와그렇게 질주하는 눈물을 껴안으며살해당한 대통령과 그의 처첩들오오, 환상의 미래와 지난 시대를실어 나른다 무수한 굴욕과 저항의 나날을묻어버린다 그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않겠냐며천천히 더러는 빨리숱한 희망과 변절의 역사를집어삼킨다 그러나 한강은 끝내남아서 지킨다 우리의 죽음 뒤우리의 자식이 남아서 우리를 지키듯이이 땅의 핍박과 치욕의 응어리를급기야 해방의 함성을, 그 아픔을기쁨을 지킨다 혼자서 더러는 .. 2024. 10. 5.
《살 것만 같던 마음》 이영광, 창비시선 0502 (2024년 5월) 계산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었다얼마세요? 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는데,책 속의 모든 얼마를 엄마로읽고 싶어졌는데 눈이 침침하고 뿌예져서안 되었다엄마세요? 불러도 희미한 잠결,대답이 없을 것이다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밤 병동에서 엄마를 얼마를,엄마는 얼마인지를알아낸 적이 없었다눈을 감고서, 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나는 열심히 하면엄마는 옛날처럼 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 엄마는 진짜 얼마세요?매일 밤 나는 틀리고틀려도엄마는 내 흰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  이영광 시인의 시 '계산'은 인간의 삶을 숫자로, 혹은 물질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시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을 "얼마"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어.. 2024. 10. 4.
《고척동의 밤》 유종순, 창비시선 0071 (1988년 9월) 식구 생각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통곡하듯 무너져내린 어둠속 정말 견디기 힘든100촉 백열전등 희뿌연 불면을 밀어내고아물지 않은 상처들 위로 포근하게 들려옵니다 누군가 손톱 빠지는 아픔으로 밤새도록 갉아대던 벽하얀 새 되어 날던 꿈마저 시름시름 앓아 누운 벽저 반역의 벽을 뚫고나지막이 따사롭게 들려옵니다 야단치는 형수님의 앙칼진 목소리야단맞는 조카놈의 울음소리허허거리는 형님의 웃음소리자식 그리운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어머니작은 우리들의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었읍니까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벽 밖에도 벽 속에도 온통 벽뿐인 저 절망의 벽과 마주서서오늘도 이렇게 작은 사랑의 소리에 귀기울이며큰 사랑을 꿈꾸고 있읍니다  면회 한 달에 단 하루그것도 단 5분간의 만남을 위해허구헌날 이 생각 저 .. 2024.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