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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74

《사월 바다》 도종환, 창비시선 0403 (2016년 10월)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깊고 긴 숲 지나요사체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그가 왜 직소폭포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그의 .. 2024. 8. 4.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이병일, 창비시선 0399 (2016년 5월) 물소리는 도반(刀瘢)을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빠르고 평평하다묶어둘 수가 없으니 한사코 곡선을 버리지 못했다 밤새도록 저 물줄기가 예리하게 반짝이는 건모래가 되지 못한 별들이 죽어물빛이 되지 못한 나무들이 죽어밝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금이 되었던 거다 그러니까 앞앞이 흘러가는 것들이 날을 간다그 날에 찔리고 베인 물고기들이 가끔 죽는다고 했다 물고기들은 물줄기에 찔리지 않으려고제 몸속 가시로 물결을 먼저 찌르고 떠서 지느러미를 깎는다 물살 뒤집어질 때마다여러번 베이고 찔려도 죽지 않는 건 물소리다일찍이 수면 바깥으로는 벗어난 적 없었으니까물소리는 물소리로 도반을 숨기고 있으니까 이병일 시인의 "물소리는 도반을"은 자연의 흐름과 그 안에 숨겨진 고통, 생명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와 고통을 은유적으.. 2024. 8. 3.
《금빛 은빛》 홍희표, 창비시선 0064 (1987년 9월) 금빛 은빛 - 씻김굿 16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임진강변의 민들레하이얀 남으로 떠나가네. 한양으로 부산으로달리고 싶어도달리지 못하는 鐵馬(철마).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임진강변의 민들레하이얀 낙한산 달고북으로 북으로 떠나가네. 평양으로 신의주로달리고 싶어도달리지 못하는 鐵馬(철마). 금빛 은빛 혼령만 오가고 ...... 홍희표 시인의 시 "금빛 은빛"은 한반도의 분단과 그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 그리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산가족이 느끼는 그리움과 상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임진강변의 민들레를 통해 분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들레는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지만 .. 2024. 7. 31.
《푸른 별》 김용락, 창비시선 0062 (1987년 3월) 푸른 별 안마당무더운 한여름 밤이 빛을 틔워가면타작 막 끝낸 보리 북더기 위에서개머루 바랭이 쇠비름 똥덤불가시풀 들이서로의 몸을 비비며마지막 남은 목숨 모기불 만들기에 한창입니다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초저녁 샛별이 뜨고연기 맵고 극성스로울수록울양대 넌출 세상 수심보릿대궁 한숨소리 깊어갈수록별은 더욱 깊어 푸르러갑니다올 여린 멍석 위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 옛이야기에 취하다 보면어느덧아버지의 야윈 어깨 위로 걸리는 초생달이밤이슬에 반짝이고달맞이꽃 개울물에 목욕 갔던누나들의 발짝 소리가쿵쿵 좁은 골목길을 흔듭니다나는 할머니 이야기의 숨결을 마저 이으며안간힘을 쓰다가 못내 잠이 들면 "밤이슬은 몸에 해롭다방에 들어가서 자그래이"나는 누군가의 포근한 품에 안겨 어디론가 가고내 누웠던 그 자리엔덩그로니 별 하나 떨어.. 2024. 7. 31.
《이슬처럼》 황선하, 창비시선 0067 (1988년 3월) 序詩(서시) - 이슬처럼 길가풀잎에 맺힌이슬처럼 살고 싶다.수없이 밟히우는 자의멍든 아픔 때문에밤을 지새우고도,아침 햇살에천진스레 반짝거리는이슬처럼 살고 싶다.한숨과 노여움은 스치는 바람으로다독거리고,용서하며사랑하며감사하며,욕심 없이한 세상 살다가죽음도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여,흔적 없이증발하는이슬처럼 가고 싶다. 황선하 시인(1931 ~ 2001)은 1962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평생 시집 한 권이면 족하다"며 꼭 한 권의 시집 을 남기고 정말 이슬처럼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인이 말한 '이슬'은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못하는 그런 깊은 계곡에 매달린 투명하고 찬란한 그런 이슬이 아니라 " 수없이 밟히우는 자의 / 멍든 아픔 때문에 / 밤을 지새우고도 / 아침 햇살에 .. 2024. 7. 30.
《콜리플라워》 이소연, 창비시선 0503 (2024년 6월) 콜리플라워 콜리플라워가 암에 좋다니 사 오긴 했는데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이 더 좋아"*댈러웨이 부인은 이 말을 다른 말과 헷갈리고나는 이 말은 누가 했는지 헷갈린다 조난당한 사람들이들판에 쌓인 눈을 퍼 먹는 장면을 봤다콜리플라워 맛이 난다 진동벨이 울린다암 걸린 애가 커피 가져와암에 걸리면 맘에 걸리는 말이 많다아픈 건 마음밖에 없네눈 뭉치 속에 숨겨놓은 돌멩이를믿고 싶다흰빛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내가 한 말들이 맘에 걸려 있다아파트 화단에 10층에서 떨어진 이불이 걸려 있다 엄마가 동영상을 보냈다나의 여인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트로트 음악이 깔리고꽃을 찍은 사진 위에 수놓은 건강 상식첫 페이지는 오이와 양파를 꼭 먹으라는 이런 건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거야 나뭇가지 휘어지는 밤흰 눈을.. 2024.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