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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74

《개밥풀》 이동순, 창비시선 0024 (1980년 4월) 序詩(서시)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꺾고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날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성난 목소리도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2024. 7. 21.
《푸른 편지》 노향림, 창비시선 0433 (2019년 6월) 비눗방울 놀이 하는 부부 맹인 부부가 유치원 마당 구석 벤치에나란히 앉아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다.아이가 수업 받는 동안 이마 맞대고빨대로 하늘 높이 날리는 비눗방울들더러 키 낮은 편백나무에 걸리기도 하고두짝의 지팡이를 기대어둔바위의 등에 앉아 쉬어가기도 하고공중 높이 떠 올라가기도 한다. 아가, 보아라, 비눗방울은 일곱 무지개 빛깔이란다.네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발음하게 된바다라는 이쁜 말이 빨주노초파남보 중에서초록빛 생명의 빛깔이라는데이 비눗방울 안에 웅크린 태아처럼 그게 숨어 있겠지.그 안에 숨은 눈 코 입을 너는 찾을 수 있지. 누군가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간다.제발 비눗방울을 터뜨리지 말았으면.너희들 희망을 밟지 말았으면. 노향림 시인의 시 "비눗방울 놀이 하는 부부"는 맹인 부부가 유치원 마당.. 2024. 7. 17.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신용목, 창비시선 0411 (2017년 7월)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나면 결국 그 시를 읽는 사람의 몫일테니시인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와 그 시를 읽는 사람의 해석은일직선일 수도, 어느 한 두 곳에서 잠시 만날 수도, 아니면 평행선일 수도 있으니신용목 시인이여 당신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그리고 소통이 실패했다고 자책하지 마시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고 창조이니 숨겨둔 말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   비가 새는 지붕이 있다면, 물은 마모된 돌일지도 모른다.   그 돌에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하구에서 빗방울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무도 내 발자국 소리를 꺼내가지 않았다. 신용목 시인의 시 '숨.. 2024. 7. 17.
《조국의 별》 고은, 창비시선 0041 (1984년 7월)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인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로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는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 2024. 7. 6.
《지금 그리운 사람은》 이동순, 창비시선 0057 (1986년 12월) 종다래끼 - 農具(농구) 노래 2 할 수만 있다면싸릿대로 이쁘게 엮은 종다리깨 하나멜빵 달아 어깨에 메거나배에 둘러차고 우리나라의 고운 씨앗을 한가득 담아남천지 북천지 숨가삐 오르내리며풀나무 없는 틈이란 틈마다 씨를 뿌리고철조망 많은 무장지대 비무장지대폭격 연습 한 뒤의 벌겋게 까뭉개진 산허리춤에다온통 종다래끼 거꾸로 쏟아 씨를 부어서저 무서운 마음들을 풀더미 속에 잠재우고도 싶고또 할 수만 있다면짚으로 기름히 엮은 종다래끼 하나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충청도 물고기 담아가서 황해도 시장에 갖다 주고함경도라 백두산 푸른 냄새를 그득그득 담아와서철없는 내 어린것에게 맛보이고 싶어라이남의 물고기 맛고 이북의 풋나물 맛이한가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라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우리나라는 하나여라 하나여라하나여.. 2024. 7. 6.
《넋이야 넋이로다》 하종오, 창비시선 0058 (1986년 11월) 시인굿  가운데에서   어떻게 한 다리 걸치고, 어떤 놈들인지, 내 이승사람이 아니니 저승소리로 한번 훑어볼 테니 들어봐라!   내 문학이 모더니즘의 모범이라 치켜세우면서 제 글도 모더니즘에 한몫을 보려는 놈! 내 문학은 소시민적 갈등 속에서태어난 도덕적 진정성이라면서 거듭 되풀이 주장하는 놈! 내 문학은 도시적 감수성만 있기 때문에 농촌적 정서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고 운명적으로 말하는 놈! 내 문학을 싸움으로 여겨 그 싸움을 또 싸워야 한다는 것을 전부로 알고 기고만장해하는 놈!  모조리 눈 감고 코끼리 다리 애무하고 있으니 내가 저승에선들 편하겠느냐?  그놈들 찬물에 손 씻고 눈 비빌 땐데  찬물에 밥 말아먹는 놈들이 또 있으니  으음 황당하다 내 시에서 난해성만 쏙 빼 제 복잡성으로 버무려, 에에 .. 2024.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