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book)/창비시선74

《달 넘세》 신경림, 창비시선 0051 (1985년 9월) 달 넘세 넘어가세 넘어가세논둑밭둑 넘어가세드난살이 모진 설움조롱박에 주워담고아픔 깊어지거들랑어깨춤 더 흥겹게넘어가세 넘어가세고개 하나 넘어가세얽히고 설킨 인연명주 끊듯 끊어내고새 세월 새 세상엔새 인연이 있으리니넘어가세 넘어가세언덕 다시 넘어가세어르고 으르는 말귓전으로 넘겨치고으깨지고 깨어진 손서로 끌고 잡고 가세크고 큰 산 넘어가세버릴 것은 버리고디딜 것은 디디고밟을 것은 밟으면서넘어가세 넘어가세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 '달 넘세'는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른다. '달을 놈아가자'는 뜻의 '달 넘세'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말해진다.   신경림 시인.. 2024. 6. 26.
《無等(무등)에 올라》 나해철, 창비시선 0044 (1984년 6월) 그건 아야해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언제나 아야해그건 아야해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바보와 같은 이 행성.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버려지는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자식과 아내, 그 행복,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이대로 간다면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증오와 파괴의 추문은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아이야 너는 오늘도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아야해, 그건 아야해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안녕 안녕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어떠 어른이냐면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름을 날리고, 뭐 그런가요, 다른 사람을 밟고 우.. 2024. 6. 16.
《꽃샘 추위》 이종욱, 창비시선 0028 (1981년 5월) 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빗이 아직 많다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마주보는 적의 얼굴가거라한치도 탐하지 말라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아 불을 당겨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갚을 빛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새우는 밤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무덤 속에서 살아 잇.. 2024. 6. 15.
《하급반 교과서》 김명수, 창비시선 0039 (1983년 5월) 후렴 여름방학을 맞아 내 아들이 가져온 성적표를 보면음악과목이 낙제점수다나는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섭섭하게도 내 아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니까목소리는 제법 우렁차지만아들의 노래는 고음에도 걸리고 저음에도 걸린다제 목소리 하나도 조정하지 못한다모처럼 노래를 시켜보아도남이 부르던 노래귓전에 익숙하고 입에 익은 가락만 흥얼거린다누구일까, 내 아들의 음성을 망치는 자는?노래를 못 부르는 조상의 피 탓일까아니면 흥에 겨워 스스로 흥얼거리는 자신의 탓일까악보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고오선지 한 줄도 제대로 보지 않는변성기도 아직 먼 내 아들에게후렴만 부르게 하는 자는 누구일까 초, 중, 고 음악시간 치르는 음악시험으로 곤욕을 치루곤 했지요. 이론 시험은 내용을 이해하면 100점, 처음에 노래 시험이 어려웠으나 KBS.. 2024. 6. 15.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창비시선 0014, 1977년 7월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어둬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世上事(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젊은 시인은 더 많은 힘을 주어 빨리 일을 끝내려고 합니다. 힘껏 내리칠.. 2024. 6. 7.
《깨끗한 희망》 김규동, 창비시선 0049 유모차를 끌며 그 신문사 사장은변변치 못한 사원을 보면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나오느냐고 했다유모차를 끌며 생각하니아이 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기저귀를 갈고 우유 먹이는 일목욕 시켜 잠재우는 일은책 보고 원고 쓸 시간을군말 없이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공연히 떼쓰거나마구 울어댈 때는 귀가 멍멍해서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되니이 경황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신기한 것은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때로 햇덩이 같은 웃음을굴리는 일이로다거친 피부에 닿는 너의 비둘기 같은 체온어린것아 네개 있어선모든 게 새롭고 황홀한 것이구나남북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거리고 자랄미국도 일본도 소련도핵폭탄도 식민지도 모르고 자랄통일조선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이 아이들 내일을 위해선우리네 목숨쯤이야 .. 2024.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