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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꽃샘 추위》 이종욱, 창비시선 0028 (1981년 5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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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빗이 아직 많다

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

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

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

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

마주보는 적의 얼굴

가거라

한치도 탐하지 말라

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

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아 불을 당겨

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

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

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

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

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

갚을 빛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

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새우는 밤

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

무덤 속에서 살아 잇는 불꽃과 만난다

 

바람이 셀수록 허리는 곧아진다

뿌리는 언 땅속에서 남몰래 자란다

 

햇볕과 함께 그림자를 겨울과 함께 봄을

하늘은 주셨으니

<反詩(반시)·1978>

 

이종욱 시인은 동아일보에 입사해서 기자를 하다가 1975년 해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활동과 <반시>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77년 <창비> 편집부 직원으로 근무도 했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 합류 문화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경기도 파주 문화마을 헤이리 쪽에 살면서 북카페 '반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의 빨간 풍선

 

광화문 네거리에

누가 버린 빨간 풍선 하나

푸른 하늘을 향해

떠오르고 있다

오늘 살아 있다 할 수 없는 우리

우리의 탯줄이

1970년대의 우울한 영혼이

 

버려라

피끓는 몸부림도

내일이면 흙이 될 고운 꽃잎들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도 남김없이

뒤를 쫓는 사냥개의 굶주린 이빨

핏발 선 두 눈 속에 버려라

그리고 빨간 풍선 하나

마지막으로 푸른 하늘을 향해 푸른 풍선 하나

모두 다 보게 버려라

 

어린날 고향 앞산에서 캐낸 수정은

땅으로 되돌아간 줄 알았더니만

이제껏 두 눈빛에 살아서

푸릉 풍선이 떠오른다

 

삼천포, 앞바다에서 건진 바다풀 한조각은

무심한 손끝에서 금시 메마르더니만

문득 한가닥 푸른 뜻이 되어서

떠오르고 있다

 

한 알의 잘 익은 사과를 씹으면

한 알의 싱싱한 사과가 된다

밟히면 조각나는 유리는

햇빛을 만나 수정이 된다

꽁꽁 안 얼음에 누워 얼음이

가마솥에 던져져 펄펄 끓는 쇳물이 된다

 

가슴마다 오직 한줄기 폭포를 남기고

가슴마다 오직 한줄기 불꽃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버려라

눈 감으면 목 졸라 오는 손목은

또 다른 사냥개의 굶주린 이빨

핏발 선 두 눈과 만난다

<反詩·1979>

 

 

허수아비

 

벌린 두 팔 위에

참새들

허수아비더러 보라고

와와 내려앉고

허수아비는

자기가 허수아비인 줄 모른다

 

허수아비가 더욱 튼튼히 세워지는 날

새떼들

이제 벼이삭 따윈 먹지 않고

허수아비는

벼가 익는 줄 모른다

 

먹이도 깨끗한 옷도

주지 않는 주인에게

온몸 비틀고 머리 자르는 손에도

감사한다

 

허수아비는

언젠가 뽑혀지는 줄도 모른다

<미발표·1976>

 

허수아비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으나, 오십대 중반 꼰대 아저씨, 어때요, 자신 있으셔요?

 

 

눈물

 

내가 만드는 어머님의 눈물 속에서

말없이 나의 눈물 끓어오르는 날

내가 어머님의 진실한 아들이 되는 날

새색시적 눈물 훔치던 어머님 치맛자락마저 보이는 날

어머님 주름이 섧고 곱고 은혜로와 가슴 저미는 날

모든 어머님의 눈물어린 눈이 갠 밤하늘의 별이 되는 날

<創作과 批評·1975>

 

어머니가 흘린 눈물을 갚으며 살 수 있을까

그 보다

앞으로 어머니 눈물 훔치는 날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훔치지 않을 어머니의 눈물,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갚을 수 있을까

 

"항상 곧게 살아가도록 몸소 모범이 되어주시며 외롭고 꿋꿌이 살고 계신 어머님, 무던한 아내, 귀여운 딸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 1980년 5월이라고 후기를 남겼는데 막상 시집은 1년 뒤에 출간되었습니다. 1980년 5월 그 엄혹한 시절 시집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