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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달 넘세》 신경림, 창비시선 0051 (1985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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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넘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고개 하나 넘어가세

얽히고 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 '달 넘세'는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른다. '달을 놈아가자'는 뜻의 '달 넘세'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말해진다.

 

  신경림 시인은 지난 달 22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인은 1956년 '갈대' 등의 작품이 <문학예술>지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듬해 홀연히 낙향하여 1965년까지 10년 가까이 광부, 농부, 장사꾼, 인부, 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목격하고 경험한 삶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통 민요를 연구하고 계승하기 위해 심혈을 끼울였습니다. 시인은 민주화운동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생태운동에도 열정을 보였습니다.

  1985년 출간된 <달 넘세>는 그의 세 번째 시집으로, <농무>와 <새재>에 이어 출간되었습니다. 3천원에서 2만원 사이의 가격에 세상에 나왔던 시집들이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책방 깊숙히 꼭꼭 쟁겨지고 있나봅니다. 몇 번이나 구매가 취소되더군요. 시집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미 판매되었었나 보다고 문자를 주신 분은 고마우신 분이었답니다. 고인이 된 시인을 만나뵐 수는 없지만, 그의 시와 글들이 많은 이들에게 그의 넉넉한 미소와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41567.html

 

‘농무’ 신경림 시인 별세…민중시로 우리의 마음 울리고

한국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8시17분께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 신경림 시인은 193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www.hani.co.kr

 

승일교 타령 -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 2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고

짐승들 짝지어 진종일 넘고

 

강물 위에서는 네 목욕하고

그 아래서는 내 고기 잡고

물길 따라 네 뜨거운 숨결 흐르고

 

조상님네 사랑 이야기

만주 넓은 벌 말 달리던 이야기

네 시작하면 내 끝내고

초저녁달 아래서 시작하면

새벽별 질 때 끝내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너와 내가 닦고 낸 긴 길

형제들 손잡고 줄지어 서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운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바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운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었듯

 

* '승일교'는 신철원과 구철원 사이의 한탄강에 놓인 다리로, 그 반은 북한측이 전쟁 전에, 그 반은 남한측이 전쟁 후에 놓았다해서,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승일교라 이름 붙여졌다는 속설이 있다.

 

남북이 연결했던 도로도 파헤치고 철길도 다시 끊고 서로 오물과 쓰레기 풍선을 주고 받고 있으니, 어느 한 쪽에서 생화학전이라고 우기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조마조마 합니다. 저러다 대포나 미사일을 주고 받으며 전쟁의 길, 파멸의 길로 들어가지 않을까.

 

 

주천강 가의 마애불 - 주천에서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두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오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거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얼굴이 웃음 띈 마애블이시죠. 그곳에서 아프지 마시고 마애블의 미소 나누며 평화와 평안의 삶 누리소서.

 

"한때 시를 그만두려다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사는 내 이웃들의 생각과 뜻을 내 시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도 있지만, 그 다짐에 그다지 충실했던 것 같지도 않다. 앞으로 더 열심히 좋은 시를 쓰고 애초의 다짐에도 더 충실하겠다고, 이 시집을 읽어줄 이들에게 거듭 다짐해둘 뿐이다."

 

* '홍지글방'는 어디에 있던 책방이었을까요? 1986년 5월 <달 넘세>와 인연을 맺었던 분, 무탈히 건강히 잘 지내시길. 시집 잘 읽고 다음에 또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