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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피뢰침과 심장》 김명수, 창비시선 0055 (1986년 8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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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를 위하여 - 분단된 이 땅의 철조망 아래, 안타까이 숨져간 미물들의 넋을 위해

 

1985년 1월 18일

캄캄한 밤 11시 15분경에

경상남도 삼천포시 해안초소 앞바다

먹이를 찾았을까

갈 길을 잃었을까

코 둘레도 정이 가는 돌고래 한 마리가

해안으로 물살쳐 헤쳐오고 있었다

 

어디에 살았던 포유류였는지

지난 봄 대공원 수족관에서

어린 딸이 손뼉 치고 환호하던 그 돌고래

재롱을 부리던 또 다른 한 마리의

형제였을까

 

동족이 총 겨누고 마주보는 이 땅에

싸늘한 해안초소

경비를 알 수 없던

아직도 다 자라지도 못했다는

그 돌고래 한 마리는

두 사병에 의해

무참하게 사살되어 떠올랐다 하는데

 

차라리 읽지 않아도 좋을 석간의 기사여 ......

 

분단된 이 땅의 철조망 아래

안타까이 죽어간 미물들의 넋들이

어찌 너 한 마리뿐이랴마는

 

1985년 1월 18일

캄캄한 밤 11시 15분경에

경상남도 삼천포시 해안초소 앞바다

먹이를 찾았을까

이 땅의 달빛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차라리 읽지 않아도 좋을 석간의 기사여 .....

 

"해안을 감시하던 그날 밤, 50미터 전방에 물살을 가르며 괴물체가 접근하자, 침투하는 간첩이라 판단을 하고 전방 15미터 거리에 이르렀을 때 ....."

 

병사는 태연스레 그 순간을 말하는데

1985년 1월 18일

캄캄한 밤 11시 15분경에

영문도 모르고

어이없이 숨져간

돌고래 한 마리

 

아, 동족이 편 갈라

싸움하는 이 땅은

 

죄 없는 짐승들

두 귀 쫑긋하고 눈동자도 맑은

노르도 고라니도

거리낌없이 찾아와 뛰어놀 땅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민중시 2집·1985>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김명수 시인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사물고 소시민을 불러내 그들의 소외와 슬픔을 위로 하는 한편 사소한 존재를 긍정하는 시와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분단 현실과 통일 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1985년 1월  18일 해안으로 접근하던 길이 1백 10cm, 무게 50kg의 돌고래를 경계근무 중이던 두 명의 병사가 간첩으로 판단 사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간첩으로 오인돼 사살된 돌고래는 부대 회식용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금강산 여행 중에 북한 초병에 의해 사살된 남한 민간인이나 야간 출입 금지 구역이 많이 줄었다지만 주의하십시요. 간첩으로 오인 사살될 수 있습니다. 더우기 남북이 풍선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엄혹한 시절이니 말입니다.

 

客土(객토)

 

농부들은

땅심이 약하면 새 흙을 넣는다

 

산에 들에 자란 풀도

거름으로 넣고

한번도 곡식을 가꾼 적 없는

붉은 새 흙 퍼다가

흙갈이를 한다

 

농부들은 농부들은

흉년이 들면

검부락지 불태워 땅 속에 묻어두고

낟알 몇 알 간추려

씨앗으로 간직한다

 

농부들은 농부들은

흉년이 들면

빈 들판 감싸안은

산허리 바라보고

흙우내 자욱한 들판에 선다

 

아, 산허리여 강줄기여

빈 들판이여!

 

지나간 한 해 돌개바람 불어

묻은 씨앗 들새가 다 물어 가고

지지나간 한 해 회호리바람 불어

뿌린 씨앗 들쥐가 다 물어 가도

 

농부들은 농부들은

들판에 서서

묵묵히 새 흙을 다시 넣는다

<16인 신작시집,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1985>

 

부화내동 일희일비 없는 삶. 그리고 묵묵히 수확을 만들어 내는 노동. 쥐새끼가 있더라도......

 

 

피뢰침 2

 

천둥도 왔다가 떠나간다

번개도 왔다가 떠나간다

온 천지 캄캄해도

먹구름도 걷힌다

 

저들의 목청이 아무리 우렁차도

저들의 채찍이 아무리 따가와도

어둠 속에 푸른 하늘

분명히 숨어 있다

 

봄이면 다시 푸른 들판의 풀잎들아

언덕에 뿌리 내릴 나무들아 가지들아

 

뿌리째 뒤흔드는 뇌성도 사라진다

자지째 뒤흔드는 폭풍도 사라진다

 

먼 하늘 햇빛이 다시 비치면

산자락도 다시 씻겨 파랗게 빛이 난다

<가족계획·1983>

 

"초라한 대로 이것이 <월식>, <하급반 교과서>에 이은 나의 세번째 시집이 되는 셈이다. 어둡고 어두운 시절이라도 책을 내는 마음은 기쁜 것일까? 시집을 낼 때마다 번번히 부끄러움만 남는다. 이 시집을 계기로 부족한 재주나마 닦달질을 하고 느슨한 마음도 단단히 죄어 매어 좀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정진해볼까 한다."

 

* "덩달아 사다. 성년의 날. 89.05.15" 멋진 사인의 주인은 저보다 어린 동생인가 봅니다. 어찌하다가 그 멋진 사인을 제게 보내주는지. 무탈하고 건강히 이 지구별 어느 곳에서 숨 나누며 웃음 나누며 그 덩달아 사게 했던 그 누구와 더불어 삶을 나누며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