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야해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
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
언제나 아야해
그건 아야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바보와 같은 이 행성.
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과 아내, 그 행복,
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
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
이대로 간다면
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
증오와 파괴의 추문은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
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
아이야 너는 오늘도
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
아야해, 그건 아야해
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
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어떠 어른이냐면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름을 날리고, 뭐 그런가요, 다른 사람을 밟고 우뚝 솟아 올라 빛나고 너만 잘 살면 되는 그런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이 지구별이 아픈 건 상관할 바 없어하는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아야해. 그건 아야해. 아이만도 못한 어른이 말입니다.
단식
너는 웃고 있었지만
셀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울었다
죽음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므로
너는 침묵의 바다에서도 웃고 있었지만
우리는 알았으므로 베인 가슴으로 울었다.
어머니 혼을 잃고 남루한 너의 누님
기절하여 포대기처럼 업혀져 갔다
그래도 너는 웃고 있다
제가 떨어져 썩음으로
희망의 풀 몇 포기 돋아나니라 믿도 있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절망했다
스스로 불쌍함 때문에
더 이상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기다리리라
맑고도 무서운 눈동자
함몰시키나 끝끝내 구원하여 새롭게 할 우리들의 신
죽어서도 묻히기 어려워
떠다니는 낮과 밤이 흐를수록
우리는 새로운 슬픔을 부르고
더욱 타오르고 뜨거워져 신의 불길
신의 보습과 날이 되겠구나
죽고 또 죽을수록 모두 깊이깊이 베이고
매서운 서러움으로 녹이고 녹여
우리를 구원하겠구나
잡초와 억새 엉겅퀴와 강아지풀
납생이 풀밭만 남는
구원의 날이 곧 오고야 말겠구나
못견디게 우러나는 사랑으로
마르고 여윈 장작으로
불꽃 같은 숨을 내쉬다 이제 평화에 드는
너는 웃고 있지만
슬픈 짐승으로 너와 우리는 모두 울었다
이 땅과 흙 우리의 새끼들을 위하여
미래와 지난 세월 그리고
그리운 자유를 위하여.
이 시를 읽다가 박관현 열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박관현 동지에게 / 김남주
혼자서 당신이 단식을 시작하자
물 한 모금 소금 몇 알로
사흘을 꿂고 열흘을 버티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배고픈 저만 서럽제 그러며
밤으로 끌려가 어딘가로 끌려가
만신창이 상처로 당신이 돌아오자
돌아와 앓는 소리 끙끙으로 사동을 채우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맞은 저만 아프제 그러며
물 한 모금 소금 몇 알로
끼니를 때우고 스무 날 마흔 날을 참다가
심근경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자
어떤 이들은 당신을 웃었습니다
죽은 저만 불쌍하제 그러며
그러나 나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냉수 한 사발로 타는 목 축이고
남은 물 그 물 손가락으로 찍어 세수하고
세수한 물 그 물로 양치질하고
여름이면 철창 밖으로 고무신을 내밀오 빗물을 받아
갈증을 풀던 그들이
당신의 죽음 그 덕으로 철철 넘치는 대야물에 세수하고
따뜻한 물로 십년 묵을 때까지 벗기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일년 삼백예순날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나는 또한 보았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게 분수라 여기고
때리면 때린 대로 맞는 게 제 분수라고 여기고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었던 그들이
간수한테 대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말을 한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식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야단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썩은 배추가 싱싱한 상추로 둔갑하여
그들의 식단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대성동 1
대성동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폐지처럼 쌓인 집들이
몸 비비며 토해낸 돌덩이의 길을 내려오면서
오래 바라보지 못한 마당이며 부엌인
한뼘 습기진 어둠
따개비처럼 벽에 박힌 문지방마다
따스하게 겹쳐 있던 검정 고무신, 슬리퍼
그리고 남비며 밥솥,
한오라기 빛 쪽으로, 기울어진 문틈에 앉아
돌의 얼굴로 침묵이거나
낡은 잡지를 그저 넘기던 노인
등뒤로 들짐승의 눈빛처럼 파랗게 빛나던
흑백 TV.
골목과 흙밭 위에서 가끔씩 아이들은
씻긴 나무뿌리처럼 엉키고
누워서 사회책일까 하늘을 가리며
책을 읽는 어린 소녀.
가파른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눈시울은 젖고, 가슴엔 일어서는 바람.
흙바람 속 대성동 사람들 이 사람들과
무엇을 했는가 뜨겁고 쓰라린 마음을 주었는가
진창의 골목길을 생각했었는가
진정으로 나는 가수가 될 수 있는가
내려가는데
흘러내리는 물지게를 진 더벅머리는 올라오고
한쪽 어둠이 열리며
박 속처럼 새벽처럼 희고 눈부신
저 처녀 쏟아지고.
* 대성동: 목포에 있는 산동네
이 시집 맨 뒤 여백에 뉴욕 어느 동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검은색 볼펜으로 적은 주인공은 왜 '대성동 1'의 위쪽 끄터머리를 접어 두었을까요? 지금 그 미국은 다녀왔을까요?
無等(무등)에 올라
무등에 올라
그리운 분지 광주가 눈시울에 가득할 때
행복했던 어느 봄 남쪽바다 제주에서 보았던
분화구 산굼부리를 생각했다.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 땅과 하늘을 태우던 용암과
뜨거운 불 토하기를 잊은 채
깊고 깊은 가슴의 끝까지
푸르른 숲과 바람과 안개를 가두고 키우던
적막의 웅덩이.
그때 나는 여행중이었고
햇빛과 나의 신부가 따뜻했으므로
둥글게 가라앉은 억 년의 고요가
차라리 평화로와 좋았다.
절망과 희망으로 혼을 놓고 다시 깨어나는
그 후의 몇 봄이 지나면서
단단하여 결코 죽지 않는
세상에 흔한 한 풀씨가 되어
어느 날 무등에 올랐을 때
의롭고 귀한 것을 위하여 눈물겹게 아프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침묵 속에 아름다왔으므로 오래 생각했다.
무엇이든 없애고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용솟음의 불덩이를 갈무리한 채로도
다만 소리없이 끝끝내 기다리던 분화구
그리고 우리들 무등.
깊은 소용돌이 희망의 화염을 다둑이는
넉넉한 사랑과
끝까지 기다림에 드는 아름다움.
2024년 올 해가 지나가기 전에 무등산에 올라보자. 더 늦기 전에.
섬진강에서
꽃가슴 물 속에 적신 채
그리운 것들의 이름을 외쳐부르던
지리산 물굽이 한 자락 압록에 이르러
그때 흐르던 맑은 물이랑을 또 보았네
흰 살결 말간 물산에 첨벙 몸을 담그니
온몸을 간지럽히는 은어새까
기쁘다 이토록 깨끗한 물줄기가 아직 살아서
철철 흘러서 오장을 가득 채우다니
채워서 불기와 한기의 얼룩내린 가슴을 씻게 하다니
평화는 이렇게 오는 거야
첫새벽 계곡을 울리는 이슬방울로
떨어져 꽃이 되는 순결한 영혼으로
우리가 끝끝내 썩지 않고 흐른다면
휴식의 날은 오는거야
물은 산굽이 산바위 휘돌 때마다
일어섰다 누우며 깊고 은은한 목소리 일으키고
철이 다 가도록 자유의 목청으로
강울음에 화답인 양 뜨겁게 노래하는 매미떼
기쁘다 이 땅에 깨끗한 물줄기 아직 살아서
몸을 누이면 덩달아 이 땅을 굽이치는
그 소리 그 맑음 아직 살아서
철철 흘러서 혼을 씻고 가슴을 헹구게 하다니.
섬진강은 아니더라도 지리산 계곡에 영과 마음과 몸을 담구고 깨끗이 씻고 헹구어보자.
새해가 오면
새해가 오면
배꼽을 드러내놓고 뛰노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주소서.
마른 나무 끝의 매운 바람이
뼈끝에서는 오래 머물게 마옵고
한 톨 성냥불빛의 희망이 꺼지지 않고
먼 데 기쁨의 바다 물소리를 가까이 들을 수 있게 해주소서.
낮과 밤을 길 위에서 보내는 사람들과
독한 먼지와 냄새 속에 맞이하는 사람들
건강한 가슴이 상한 것들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시고
때때로 꽃이 되게 해주소서.
기다림에 지치고 넋잃은 사람들의
목숨 같은 그리움은 끝이 없으므로
어디서나 만나게 해주소서. 남이나 북
바다 끝이나 창공, 아침이나 황혼
어디서나 만나 목 부비며 울게 해주소서.
진실로 헤오지기 싫은 밤 깊이의 가난한 형제와 오누이는
오래 같이 있게 해주시고
외로움이 덜하도록 여위 몸에 새 불기를 넣어주소서.
당당하고 단단하여 좀처럼 슬퍼하지 않는 탄탄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흔한 사랑과 눈물의 깊은 하늘을 내비추시고
가끔씩 가슴 깊이 흐느끼게 하소서.
이 땅의 사람들이 서로 섞아어 하나 되어
제 살이 아프므로 누구건 내려치지 않게 해주소서.
수풀과 잡목림, 께끗한 새벽과 바람처럼
새해가 오면 끝까지
부끄럽지 않게 해주소서.
아이들과 꽃, 구름과 별
풀과 나무, 착한 짐승들에게.
2024년 6월도 중순을 넘어 갑니다. 2023년 12월 2024년을 맞으며 다짐했던 것들 돌아보며 다시 영과 마음과 몸을 추스립니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해주소서 기도합니다. 아이들과 꽃, 구름과 별, 풀과 나무, 착한 짐승들, 그리고 가까이 그이와 이 지구별 공동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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