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7 《잠든 사람과의 통화》 김민지, 창비시선 0509 (2024년 9월) 너의 전체는 이렇다 한 아이의 손끝 수수깡과 이쑤시개로 만든집실로폰 채 끝에 그려 넣은 얼굴 돔과 같은 마음둥근 천장을 향해 던지는 공 직선으로 뻗지 않고허공을 하산하는 중력 김민지 시인의 시 '너의 전체는 이렇다'는 단순한 표현 속에서 아이의 세계와 삶의 흐름을 담당하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수수깡과 이쑤시개로 만든 집'은 아이가 손끝으로 창조해내는 작은 세계를 상징합니다. 소박한 재료로도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습은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그 의미는 무한히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돔과 같은 마음'과 '둥근 천장을 향해 던지는 공'은 아이의 둥글고 포근한 마음을 연상시킵니다. 직선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아이의 세계는 경계가 없이 확장되며, 상상력과 호기심이 닿는 곳이라면 어.. 2024. 11. 8.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0118 (1992년 5월) 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초라한 남녀는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일금 이 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이 있다네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한 벗은젖은 알몸들이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또 좀 불우해서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인의 '불우한 악기'는 삶의 불우함과 고독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에 젖은 남녀가 서로 기.. 2024. 10. 20. 《새벽 들》 고재종, 창비시선 0079 (1989년 9월) 마늘싹 -농사일지 4 춘분날아직 햇살 차고 바람도 찬 날매화꽃 환한 텃밭의 지푸라기 걷어내니송곳처럼 언 땅을 뚫은마늘싹들의 예리함이여솟아라 솟아라 마늘싹들의 서늘함이여지난 겨울 내내신경통으로 우시더니 벌써머리에 수건 쓰고 마늘밭에 앉으신 어머니랑결코 한번의 겨울로 끝나지 않는삶이랑역사랑. 노오란 병아리를 여남은 마리나 데불고암탉도 마늘밭에 나선다. 고재종 시인의 시 '마늘싹'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춘분날, 아직 차가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마늘싹. 그 마늘싹처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처럼 강인한 생명력. 겨우내 신경통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봄이 오자 다시 밭으로 나섭니다. 마치 마늘싹처럼 .. 2024. 10. 15.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0438 (2013년 11월) 괜찮아 테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아파서도 아니고아무 이유도 없이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벌릴까 봐나는 두 팔로 껴안고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왜 그래.왜 그래.왜 그래.내 눈물이 떨어져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했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괜찮아.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누그러진 건 오히려내 울음이었지만, 다만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 한강 시인의 시 「괜찮아」는 아이가 저.. 2024. 10. 13.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은봉, 창비시선 0078 (1989년 9월) 한강 한강은 흐른다 마구 튀어오르는온갖 잡동사니, 썩어 문드러진 서울의불빛을 감싸며 한강은죽음의 찌꺼기를 궁정동의 총성을실어 나른다 토막난 나라그 남쪽의 노동과 밥과 꿈오월의 한숨과 피울음을개거품처럼 주억거리며 한강은흐른다 차마 그냥 말 수는 없다는 듯이몸뚱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밀려가는 버스와 트럭과 택시와그렇게 질주하는 눈물을 껴안으며살해당한 대통령과 그의 처첩들오오, 환상의 미래와 지난 시대를실어 나른다 무수한 굴욕과 저항의 나날을묻어버린다 그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않겠냐며천천히 더러는 빨리숱한 희망과 변절의 역사를집어삼킨다 그러나 한강은 끝내남아서 지킨다 우리의 죽음 뒤우리의 자식이 남아서 우리를 지키듯이이 땅의 핍박과 치욕의 응어리를급기야 해방의 함성을, 그 아픔을기쁨을 지킨다 혼자서 더러는 .. 2024. 10. 5. 《살 것만 같던 마음》 이영광, 창비시선 0502 (2024년 5월) 계산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었다얼마세요? 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는데,책 속의 모든 얼마를 엄마로읽고 싶어졌는데 눈이 침침하고 뿌예져서안 되었다엄마세요? 불러도 희미한 잠결,대답이 없을 것이다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밤 병동에서 엄마를 얼마를,엄마는 얼마인지를알아낸 적이 없었다눈을 감고서, 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나는 열심히 하면엄마는 옛날처럼 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 엄마는 진짜 얼마세요?매일 밤 나는 틀리고틀려도엄마는 내 흰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 이영광 시인의 시 '계산'은 인간의 삶을 숫자로, 혹은 물질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시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을 "얼마"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어.. 2024. 10. 4. 이전 1 2 3 4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