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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0118 (1992년 5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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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 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이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한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인의 '불우한 악기'는 삶의 불우함과 고독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에 젖은 남녀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은 삶의 고단함을 상징하며, 그들이 노래하는 모습은 불우함 속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시 속의 악기들은 그들의 불우한 삶을 반영하듯, 자신의 고통을 담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언급된 왕릉은 삶과 죽음, 그리고 고난을 묵묵히 바라보는 듯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그 왕릉 근처에서 엉켜 붙었다가 멀어지는 초라한 남녀의 모습은, 결국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나는 삶의 쓸쓸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몸의 굴곡은 마음의 굴곡이 되어, 어디 먼 곳으로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악기는 불우한 존재임을 이야기합니다. 불우함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지복을 찾으며,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불우한 악기'는 삶의 슬픔과 고독을 잔잔하게 그려내면서도,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으려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시 속의 남녀는 불우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악기처럼 자신의 고통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결국 떠나지만, 그들의 모습은 삶 속에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허수경 시인의 '마치 꿈꾸는 것처럼'은 삶과 관계의 허무함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냅니다. 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곁에 누워있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불확실함과 거리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마음끼리 서로 닿고 싶지만, 결국 살을 섞을 수 없 현실 앞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곁에 누워 있는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봄 햇살과 대마잎을 피우던 기억은 과거의 자유로움과 일탈을 떠올리게 하고, 그 속에서 순간적인 평온함을 느끼지만, 결국 덧없음이 느껴집니다. 삶 속에서 관계를 맺고,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 속에서 마음은 떠나고, 삶의 허무함은 더 깊어집니다. 밥을 한솥 해놓고, 그것을 먹는 것마저 꿈속의 장면처럼 묘사됩니다. 마치 잠드는 것, 죽는 것과도 같은 삶의 끝을 암시합니다. 삶과 죽음, 사랑과 관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시 속에서 반복됩니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은 삶의 허무와 관계의 불확실성을 부드럽게 풀어냅니다. 마음과 마음이 곁에 누워 있지만, 그들은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느끼며, 그 거리 속에서 삶의 무상함을 깨닫습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감정의 복잡함과 덧없음을, 마치 꿈꾸는 듯한 흐름 속에서 그려냅니다.

 

 

골목길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오는 퉁 불거진 사내를 만나거나 하얀 모시를 처맨 다 시어빠진 여편네를 만난다

 

  삶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보양의 탕 속에서 녹작지근해지거나 혹

  천기누설의 값을 치르고 몇 가지 길흉을 얻어내는 게 너냐?

  어쩌자고 고여 있는 것들은 뚱뚱해지거나 비썩 마르게 되는가

 

  마음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그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서 몸은 마른 쥐껍데기

  사라진 몸은 이빨 자국만 남긴다 버려진 욕망 같은 저 수박 껍데기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두 다리를 오므리고 소리죽여 오줌 누는 계집에를 만난다

  오줌 줄기가 내어놓은 →의 아련함, 무심함으로

  슈퍼 라디오는 노래한다 라디오는 흐른다

 

  그런 것이냐, 견딜 수 없는 저열과 함께

  → 쭉 따라, 가는 게 너냐 그런 것이냐

 

허수경 시인의 '골목길'은 삶의 저열함과 불확실성을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시 속에서 반복되는 막다른 곳과 버려진 것들은 삶의 무게와 그 속에서 맞닥뜨리는 허무함을 나타냅니다. 퉁 불거진 사내나 시어빠진 여편네, 그리고 마른 쥐껍데기 같은 몸은 각자의 삶 속에서 소모된 존재들로, 삶의 한 구석에 버려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시인은 삶에게 묻습니다. 보양의 탕 속에서 녹아내리거나, 길흉을 알아내려는 몸부림 속에서 뚱뚱해지거나 비썩 마르는 것이 삶의 본질인지. 그리고 욕망을 남긴 채 버려진 수박 껍데기처럼, 사라진 욕망과 허기는 결국 남는 게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특히, 오줌 누는 계집아이의 모습은 삶 속에서의 순간적인 아련함과 무심함을 대변합니다. 삶은 마치 골목길처럼 방향을 잡기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저열함과 함께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디오의 노래처럼, 삶은 흐르고 흘러가지만 그 안에 의미와 방향을 찾기 어려운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이 시는 삶의 부조리와 덧없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막다른 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소모되고 버려진 존재들이며,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의 불확실함과 허무함을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쓸쓸한 여관방

 

꿈에도 길이 있으랴 울 수 없는 마음이여

그러나 흘러감이여

 

제일 아픈 건 나였어 그래? 그랬니, 아팠겠구나

누군가 꿈꾸고 간 베개에 기대 꿈을 꾼다

 

꽃을 잡고 우는 마음의 무덤아 몸의 무덤 옆에서

울 때 봄 같은 초경의 계집애들이 천리향 속으로

들어와 이 처 저 처로 헤매인 마음이 되어

나부낀다, 그렇구나! 그렇지만 아닐 수는 없을까

 

한철 따숩게 쉬긴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몸은 쉬고 간다만은 마음은? 마음은 흐리고 간다만 몸은?

네 품의 꿈, 곧 시간이 되리니 그 품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오오, 네 품에도 시간이 있어

 

한 날 낙낙할 때 같이 쓰던 수건이나 챙겨

어느 무덤들 곁에 버려진 꿈처럼 길을 찾아

낙낙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며 있으리라

 

허수경 시인의 '쓸쓸한 여관방'은 삶의 덧없음과 슬픔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시 속에서 반복되는 흐름과 흘러감은,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시간과 떠나야 하는 운명을 말합니다. 꿈꾸고 간 자리에 남아 있는 베개에 기대어 또 다른 꿈을 꾸는 모습은, 삶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드러냅니다. 마음과 몸의 상반된 흐름, 몸은 떠나고 마음은 남아있는 것처럼,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떠나지만 마음 속 깊이 남아있는 감정들이 존재합니다. 꽃을 잡고 우는 마음과 몸의 무덤은, 우리가 겪어온 상실과 아픔을 말하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고독한 감정들이 묻어납니다. 시에서 시간의 흐름과 떠나야 할 시간을 말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흘러가야 한다는 불가피한 진리를 상기시킵니다. 한때 뜻하게 쉬었던 시간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임을 알립니다. 누군가의 품에도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삶이 우리에게 남긴 한정된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낙낙한 햇살 아래 졸며 있는 모습은 삶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평온한 고독을 상징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날 떠나게 되지만, 그 길 위에서 남겨진 꿈처럼 조용히 그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쓸쓸한 여관방'은 삶의 고독과 덧없음,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슬픈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떠나야 하는 순간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고독한 감정과 상실을 섬세하게 느끼게 합니다.

 

허수경 시인의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을 접어둔 그이는 이 지구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왜 이 쪽을 접어두었는지 궁금하네요. 아무쪼록 건강히 그리고 때때로 시를 나누면 팍팍한 삶의 어려움을 풀어가길 소망합니다. 

 

스승은 병중이시고 시절은 봄이다.

속수무책의 봄을 맞고 보내며 시집을 묶는다.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 나는 사랑을 회존시킬 수 있을까,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나는 이제 떨쳐 떠나려 한다.

1992년 4월

허    수   경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6632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허수경 시인 6주기, 그리워 하며 닮아가려는 이들의 추모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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