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7 《고척동의 밤》 유종순, 창비시선 0071 (1988년 9월) 식구 생각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통곡하듯 무너져내린 어둠속 정말 견디기 힘든100촉 백열전등 희뿌연 불면을 밀어내고아물지 않은 상처들 위로 포근하게 들려옵니다 누군가 손톱 빠지는 아픔으로 밤새도록 갉아대던 벽하얀 새 되어 날던 꿈마저 시름시름 앓아 누운 벽저 반역의 벽을 뚫고나지막이 따사롭게 들려옵니다 야단치는 형수님의 앙칼진 목소리야단맞는 조카놈의 울음소리허허거리는 형님의 웃음소리자식 그리운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어머니작은 우리들의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었읍니까 어머니정다운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벽 밖에도 벽 속에도 온통 벽뿐인 저 절망의 벽과 마주서서오늘도 이렇게 작은 사랑의 소리에 귀기울이며큰 사랑을 꿈꾸고 있읍니다 면회 한 달에 단 하루그것도 단 5분간의 만남을 위해허구헌날 이 생각 저 .. 2024. 9. 13. 《목숨을 걸고》 이광웅, 창비시선 0073 (1989년 3월) 이광웅(1940~1992)는 1967년 에 유치환의 추천으로, 1974년 에 신석정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습니다. 1982년,월북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된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됩니다. 이들은 20여 일간 모진 고문 끝에 '교사 간첩단'으로 조작되었습니다. 이광웅 시인은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7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이후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했으나, 1989년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다시 교단에서 쫓겨납니다. 2008년이 되어서야 이광웅 시인은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오송회' 사건의 재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11년 대법원은 국가 배상을 판결했습니다. 1985년 첫 시집 을 시작으로 둘째 시집 , 셋째 시.. 2024. 9. 8.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도종환, 창비시선 0501 (2024년 5월)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깊고 고요한 밤입니다고요함이 풀벌레 울음소리를물결무늬 한가운데로 빨아들이는 밤입니다적묵의 벌판을 만나게 하여주소서안으로 흘러 들어와 고인어둠을 성찰하게 하여주소서내가 그러하듯 온전하지 못한 이들이 모여세상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어제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였습니다그러니 도덕이 단두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비수를 몸 곳곳에 품고 다니는 그림자들과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관용은 조롱당하고계율은 모두를 최고 형량으로 단죄해야 한다 외치고 있습니다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면죄는 없습니다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우리 안의 깊은 곳도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 2024. 9. 8. 《두 하늘 한 하늘》 문익환, 창비시선 0075 (1989년 6월)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라는 사람 손을 잡고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한마음그래 그 한마음으로우리 선.. 2024. 9. 8.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임강빈, 창비시선 0076 (1989년 9월) 혼자 마시기 목로에 혼자 앉아마시기까지는꽤나 긴 연습이 필요하다.독작이 제일이라던어느 작가의 생각이 떠오른다.외로워서 마시고반가워서 마시고섭섭해서사랑해서그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혼자 마시는 술이제일 맛이 있단다.빗소리 간간히 뿌리면더욱 간절하다 한다.생각하며 마실 수 있고인생론과 대할 수 있고아무튼 혼자서 마시는 맛그것에 젖기까지는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들깨꽃 돌멩이 골라내어두어 평 밭을 일구다들깨 모종을 하다아기 손바닥만하게건강하게 자라서잎 사이사이꽃자루에 다닥 피어보일 듯 말 듯 부는 바람에안간힘쓰다작아서 부끄러운가더러는 일찍 그늘에 숨다이 꽃보다우리는 얼마나 작아 보이나아직은 따가운 햇볕공터 언저리하얀 들깨꽃잔잔한 외로움. 무지재 둠벙에서긴 대나무 끝에 매달은 낚시로붕어새끼 몇 마리 잡다.. 2024. 9. 8.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고정희, 창비시선 0077 (1989년 9월) 첫째거리 - 축원마당여자 해방염원 반만년 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 어머니여마음이 어질기가 황하 같고그 마음 넓기가 우주천체 같고그 기품 높기가 천상천하 같은어머니여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인간세계 본은 어머니의 자궁이요살고 죽는 뜻은 팔만사천 사바세계어머니 품어주신 사랑을 나눔이라 그 품이 어떤 품이던가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인 세월홍수 같은 피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조석으로 이어지는 피눈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열 손가락 앞앞이 걸린 자녀들쭉날쭉 오랑방탕 인지상정 거스르는오만불손도 마다하지 않으시고문전옥답 뼈빠지게 일구시느라밥인지 국인지 절절끓는 모진 새월도마다하지 않으시고거두신 것 가진 것 다 탕진하는오만방자 거드름도 마다하지 않으시고밤인가 낮이런가 칠흙 깜깜절벽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세월인생무상 .. 2024. 9. 7. 이전 1 2 3 4 5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