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7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이병일, 창비시선 0399 (2016년 5월) 물소리는 도반(刀瘢)을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빠르고 평평하다묶어둘 수가 없으니 한사코 곡선을 버리지 못했다 밤새도록 저 물줄기가 예리하게 반짝이는 건모래가 되지 못한 별들이 죽어물빛이 되지 못한 나무들이 죽어밝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금이 되었던 거다 그러니까 앞앞이 흘러가는 것들이 날을 간다그 날에 찔리고 베인 물고기들이 가끔 죽는다고 했다 물고기들은 물줄기에 찔리지 않으려고제 몸속 가시로 물결을 먼저 찌르고 떠서 지느러미를 깎는다 물살 뒤집어질 때마다여러번 베이고 찔려도 죽지 않는 건 물소리다일찍이 수면 바깥으로는 벗어난 적 없었으니까물소리는 물소리로 도반을 숨기고 있으니까 이병일 시인의 "물소리는 도반을"은 자연의 흐름과 그 안에 숨겨진 고통, 생명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와 고통을 은유적으.. 2024. 8. 3. 《뜻밖의 대답》 김언희, 민음의 시 125 (2005년 3월) 9분전 근무 중의 手淫(수음)책상다리 사이로 매독이 퍼진다 아침 열 시에 디지털 자지에서 디지털 정액이 흘러넘치고 빠는 기계 당신은빨아서 모든 것을말려죽이지 불길하고 더러운 새 소식과만 원짜리 몇 장 쥐고 흔드는 음탕한 미래 깜빡잠들었다가 나는백발이 된 채 깨어난다 미스 리천국에서 나가는 길 좀가르쳐줘 천국에서 나가는 길을애인보다 더 애인 같은 애인이 가로막고 있다肉重(육중)하고 무자비한, 내장의무게만백 킬로는 될 미치지 않았으면 맛볼 수 없었을 세상 9분 전이다 김언희 시인의 시 "9분 전"은 강렬한 이미지와 생생한 묘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 고립감, 자아 상실을 표현합니다. 시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 소외, 성적 혼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다룹니다. "디지털 자지에서 디지털 정액이 흘러.. 2024. 8. 3. 《금빛 은빛》 홍희표, 창비시선 0064 (1987년 9월) 금빛 은빛 - 씻김굿 16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임진강변의 민들레하이얀 남으로 떠나가네. 한양으로 부산으로달리고 싶어도달리지 못하는 鐵馬(철마).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면임진강변의 민들레하이얀 낙한산 달고북으로 북으로 떠나가네. 평양으로 신의주로달리고 싶어도달리지 못하는 鐵馬(철마). 금빛 은빛 혼령만 오가고 ...... 홍희표 시인의 시 "금빛 은빛"은 한반도의 분단과 그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 그리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산가족이 느끼는 그리움과 상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월이 가고 유월이 오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임진강변의 민들레를 통해 분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들레는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지만 .. 2024. 7. 31. 《푸른 별》 김용락, 창비시선 0062 (1987년 3월) 푸른 별 안마당무더운 한여름 밤이 빛을 틔워가면타작 막 끝낸 보리 북더기 위에서개머루 바랭이 쇠비름 똥덤불가시풀 들이서로의 몸을 비비며마지막 남은 목숨 모기불 만들기에 한창입니다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초저녁 샛별이 뜨고연기 맵고 극성스로울수록울양대 넌출 세상 수심보릿대궁 한숨소리 깊어갈수록별은 더욱 깊어 푸르러갑니다올 여린 멍석 위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 옛이야기에 취하다 보면어느덧아버지의 야윈 어깨 위로 걸리는 초생달이밤이슬에 반짝이고달맞이꽃 개울물에 목욕 갔던누나들의 발짝 소리가쿵쿵 좁은 골목길을 흔듭니다나는 할머니 이야기의 숨결을 마저 이으며안간힘을 쓰다가 못내 잠이 들면 "밤이슬은 몸에 해롭다방에 들어가서 자그래이"나는 누군가의 포근한 품에 안겨 어디론가 가고내 누웠던 그 자리엔덩그로니 별 하나 떨어.. 2024. 7. 31. 《이슬처럼》 황선하, 창비시선 0067 (1988년 3월) 序詩(서시) - 이슬처럼 길가풀잎에 맺힌이슬처럼 살고 싶다.수없이 밟히우는 자의멍든 아픔 때문에밤을 지새우고도,아침 햇살에천진스레 반짝거리는이슬처럼 살고 싶다.한숨과 노여움은 스치는 바람으로다독거리고,용서하며사랑하며감사하며,욕심 없이한 세상 살다가죽음도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여,흔적 없이증발하는이슬처럼 가고 싶다. 황선하 시인(1931 ~ 2001)은 1962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평생 시집 한 권이면 족하다"며 꼭 한 권의 시집 을 남기고 정말 이슬처럼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인이 말한 '이슬'은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못하는 그런 깊은 계곡에 매달린 투명하고 찬란한 그런 이슬이 아니라 " 수없이 밟히우는 자의 / 멍든 아픔 때문에 / 밤을 지새우고도 / 아침 햇살에 .. 2024. 7. 30.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김언희, 민음의 시 0095 (2000년 3월) 햄버거가 있는 풍경 식빵 한 조각을 깔고 식빵 한 조각을 덮고다져진 살코기가 오한을참고 있다 짓무른 상추 혓바닥에검은 반점들이 번지고 엎어놓은 스텐 식기 아래 두 손을 사타구니에 찌른 채 도르르 몸을 말고 죽어 있는 괄태충 행운목은, 토막난 몸에서 돋아나오는 잎사귀를 증오한다 제 잎사귀가아닌 푸른 김언희 시인의 시 '햄버거가 있는 풍경'은 현대 사회의 소외와 부조리를 햄버거라는 일상적인 음식을 통해 묘사한 작품입니다. 시는 불편한 이미지와 강렬한 대조를 통해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햄버거라는 친숙한 음식 속에 숨겨진 고통과 파괴,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고립을 통해 자신이 소비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 괄태충: 민달팽이 그라베 그 여자의 몸속에는 그 남자의 시신.. 2024. 7. 24. 이전 1 2 3 4 5 6 7 8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