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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푸른 별》 김용락, 창비시선 0062 (1987년 3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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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별

 

안마당

무더운 한여름 밤이 빛을 틔워가면

타작 막 끝낸 보리 북더기 위에서

개머루 바랭이 쇠비름 똥덤불가시풀 들이

서로의 몸을 비비며

마지막 남은 목숨 모기불 만들기에 한창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초저녁 샛별이 뜨고

연기 맵고 극성스로울수록

울양대 넌출 세상 수심

보릿대궁 한숨소리 깊어갈수록

별은 더욱 깊어 푸르러갑니다

올 여린 멍석 위

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 옛이야기에 취하다 보면

어느덧

아버지의 야윈 어깨 위로 걸리는 초생달이

밤이슬에 반짝이고

달맞이꽃 개울물에 목욕 갔던

누나들의 발짝 소리가

쿵쿵 좁은 골목길을 흔듭니다

나는 할머니 이야기의 숨결을 마저 이으며

안간힘을 쓰다가 못내 잠이 들면 

"밤이슬은 몸에 해롭다

방에 들어가서 자그래이"

나는 누군가의 포근한 품에 안겨 어디론가 가고

내 누웠던 그 자리엔

덩그로니 별 하나 떨어져 누워 있지요

나는 푸른 별이지요

풀물 배오나오듯

미칠 그리움과 설움으로 익어온

나의 시도 푸른 별이지요

 

김용락 시인의 시 '푸른 별'은 시골 마당에서의 여름 밤 풍경과 가족들과의 추억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고단한 농촌의 삶 속에서도 단단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느껴집니다. '울양대 넌출 세상 수심', '보릿대궁 한숨소리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야윈 어깨'는 고단한 삶과 그 속에 담긴 애틋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가족과 함께한 추억을 되새기며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드는 모습, 아버지의 어깨 위로 걸리는 초생달, 누나들의 발짝 소리 등 가족과 함께한 순간들이 따뜻하게 묘사됩니다. '나는 푸른 별이지요'라는 구절은 시인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푸른 별'은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따뜻한 감동을 줍니다.

 

 

손국수

 

비가 오는,

장마비가 미류나무 가지처럼 휘어져 내리는 날

퇴청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듯

어머니는 손국수를 민다.

수대를 물려 내려온 나왕목 국수안반을 놓고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고 있는

어머니의 손놀림은

마치 줄럼기를 하는 듯 천진난만하고 경쾌하지만

연로한 어머니의 주름살은 밭이랑처럼

너무나 깊게 패어져 있다.

무엇을 생각하며 국수를 미는지

안반 위 밀가루 반죽의 한 귀퉁이가 엷게 뚫어지자

어머니는 재빨리 바가지 속의 밀가류 반죽을 떼어

습관처럼 뚫어진 곳을 다시 때운다.

저렇듯 무심한 어머니의 노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평생을 반추해본다.

열여섯 나이에

가난한 소작농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큰소리 한번 없이

육남매 키우시면서

숱한 우여곡절 굽이마다 눈물로 넘어

다리 한번 마음놓고 편히 쭉 뻗지 못하시는

농사꾼 어머니,

무엇이 그토록 어머니를 마음 졸이게 했을까.

자식들이라는 것이 고작

장마 끝물에 달린 개똥참외보다 나을 것도 없는

우리들의 삶이 저렇듯 손국수의 밀가루 반죽처럼

때론 어이없이 뚫어져버린 허술함으로 가득찰 때

어머니는 자신의 살점을 뜯어

우리들의 뚫어진 곳을 채워주며 살아오시지 않으셨던가.

사내 나이 이십대 후반이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나는 저 무심한 듯한 어머니의

노동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면서

비가 오는

장마비 속에서 뜨거운 손국수를 후루룩 먹으면

가슴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종내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눈시울마저 뜨거워지고,

 

김용락 시인의 시 '손국수'는 비 오는 날 어머니가 손국수를 미는 모습을 통해 고단한 삶 속에서도 묵묵히 가족을 돌보는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는 어머니가 젊은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육남매 키우시면서 숱한 우여곡절 굽이마다 눈물로 넘어'가는 장면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습을 잘 나타냅니다. 어머니의 주름살이 밭이랑처럼 깊게 팬 모습, 그리고 한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묵묵히 일해온 삶은 고단함과 인내의 상징입니다. 시는 이러한 어머니의 삶을 통해 인간의 강인함과 인내심을 조명합니다.

 

 

운전사

 

그 시절의 내 꿈은 운전사였읍니다

분명 한때 내 꿈은 우리나라 최고의 트럭 운전사가 되는 것이었읍니다

얼마쯤 낡고 툴툴거리는 트럭에다가

산판 현장에서 막 베어낸 아름드리 생목과

별 쓸모없는 잡목 토막까지도

한 차 가득 싣고 전국 탄광의 갱목이나

성냥공장 혹은 이쑤시개 제조장으로도

휘파람을 불며 유쾌하게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곳곳에다 필요한 목재를 공급해주는

그런 운전사이고 싶었읍니다

자갈밭이나 진흙탕이 나타나면 더욱 부드럽게 운전하고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저녁 무렵에는

플라타너스가 파도처럼 물결치는 한적한 시골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빼어 무는 여유도 보이면서

생을 관조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소도시 공업학교의 교사가 되었읍니다

해마다 지원자 수가 줄어드는 실업교육의 일선에서

내 앞에 놓인 아이들은

소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성적도 없는

대학진학 못하는 죄로 인문계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들

툭하면 의자로 찍고 칼로 찌르고 파출소에 불려가고

때로는 대담하게 교사용 변소에서

담배 피우다가 교무실로 불려와 얻어터지고

이웃 여학교 학생들과 미팅할 때도

공고 학생이라고 제풀에 눌려

미팅 비용 다 대기로 소문난 측은한 아이들

열번 잘하다가 한번만 못해도

할 수 없는 놈들이라고 선생님들에게마저도 낙인 찍히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운전사이고 싶읍니다

이 잡목과도 같이 버려지고 있는 아이들을 한 트록 가득 싣고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간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곳으로 운반해주는

지금도 그런 운전사이고 싶읍니다

 

김용락 시인의 시 '운전사'는 꿈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의 순수한 꿈과 현재의 현실을 대비시켜, 현실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전히 운전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과 변화를 가져다주고자 합니다. 이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마음을 전달합니다. 시는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시인은 소외된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자 하며, 이는 인간 존중과 평등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망월동 - 옥중의 고규태에게

 

3

 

무덤 앞에서

죽음의 냄새가 채 사라지지 않은

팔월의 뜨겁고 끈적한 빛줄기가 나를 옭죄일 때

나는 숨막히는 듯한 갈증으로 목이 탔었다

살아생전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

그래서 더욱 그리운 형제들의 죽음 앞에서

소주 몇 방울 뿌려놓고 엎디었을 때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들의 진실 앞에서

살아 있음이 그렇게 욕되게 느껴졌을 때가

또 있었을까

종내 눈물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그곳

사랑과 역사

우리 나아갈 길을 다시 깨우치고 떠나온 곳

그때 두 손 꽉 움켜쥐던

너의 체온은 아직도 내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오늘 화살처럼 날아와 내게 박히는 소식 한 점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

그 엄청난 죄명은 망월동 가는 길목의 푸른 하늘

푸른 들판 꿈꾸며

푸른 세상 꿈꾸며 만들어낸

책 때문

 

"나에게 남겨지는 '시 쓰기'의 가장 큰 몫은 인간적인 참다운 삶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의 매개인 동시에 또한 산물로서의 역할이다. 나의 시는 내 자신과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줄 아는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거짓없이 그렸으며, 역사가 그들의 것이듯이 당연히 이 시집도 그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 시는 그들에게 언제나 열려진 따뜻한 마음, 진실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 더 나아가서 주체적 자기 각성과 사회변혁의 가열한 무기가 되었으면 하고 원해보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나의 욕심일 성싶다."

 

 

저는 시집을 읽을 때 발문을 읽지 않습니다. 시평론가들의 말이 너무 어렵기도 하고, 시에 대한 제 솔직한 느낌을 즐기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김용락 시인의 <푸른 별>의 발문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발문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시인의 시를 다 읽은 뒤에 권정생 선생님의 발문을 마주하니 시인의 시가 더 생생하게 살아나고 다가오더군요.

 

 

跋文(발문)

 

성실하고 따뜻한 시인 / 권정생

 

  흑인들은 흑인들만의 시를 갖고자 한다고 했다. 백인들의 성숙되고 세련된 높은 수준의 시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서툰 대로 그들의 시를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흑인들과 우리 조선인들은 같은 처지의 고통받는 민족이다. 슬픈 사람이 울 때엔 어떤 기교나 모양 같은 건 상관없다. 오히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우는 울음은 거짓이며 비굴한 짓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가 있어야 한다. 서툴고 흠집이 있더라도 당당하고 정직한 목소리로 불려질 수 있는 시라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많은 시를 읽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시와 시인도 몇몇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좀 색다른 시인 하나를 오래도록 사랑했다.

  그는 단 두 편의 시를 발표한 채 30년이 지나기까지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 허만덕이라 이름하는 십대의 소년시인의 시는, 1954년 『학원』 잡지 11월호의 독자란에 투고하여 두 편의 시가 발표되었다. 「비오는 날」 「왜 나는 웃는가?」란 두 편의 시는 내가 그 잡지에서 뜯어내어 여지껏 간직해왔다.

  그 중 한 편만 여기 옮겨보기로 하겠다.

 

왜 나는 웃는가? 

 

목이 마르기에 물을 찾듯이

이토록 ......

어지럽힌 삶들이기에

목말라 하늘과 바다를 냅쳐 쓰다듬는다.

 

할배와 아배와 그리고 내가 겪어왔던 얘기

그것은 전부다 다 꾸민 얘기

그것보다 몇 갑절 더 절실했고 슬펐기 때문에

오히려 대담히도 울지 않을 수 있는

...... 바로 한 시간 전까지도 얘기하고 있었던

산 한 사람의 친구가,

갑작하게도 한 뭉치의 죽은 시체로서

우리를 맞아주었을 때의 '경악' 그것처럼 .....

서러운 얘기가 다투던

 

눈물이 이미 마른 눈알에 맺힐 리 없을 것은

산불에 그슬려진 새까만 숯덩어리

나무에서 즙을 구하는 것처럼

내겐 그렇게도 어려운 주문이 되어야 한다.

 

멍하다 못해 이젠 흥겨워지려는 심사를 안고

목타오르는 생활 속에서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로 문질러가며

바다 속의 진주알을 찾아내듯이

하늘 속의 구름을 뽑아내듯이

잡아보고 읽어보고 ......

 

웃어보고 웃어보고 ......

목이 마르기에 물을 찾듯이

 

  주로 고등학교 학생들의 투고작품으로 이루어졌던 이 독자란에 유일하게 허만덕만은 학교명도 학년도 없이 '부산시 대창동"이란 짤막한 주소만 적힌 걸 보아, 그는 학교에도 못 다닌 독학생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비오는 날」의 시에는 판자집 양철지붕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빗물을 양동이로 받아내면서 "나는 결코 슬픈 게 아니올시다"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만의 감정과 체취를 느끼게 하는 특이한 소년으로 보여진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 가난, 극한의 고독은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어 모두가 난폭해지거나 비굴해졌던 상황에서 허만덕은 너무도 대범하고 너그럽다. 어처구니없이 잇따르는 슬픔 속에서도 그 슬픔을 가슴 깊숙이에서 삭이면서 오히려 하늘과 바다까지 쓰다듬을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조선인의 심성이며 시심인 것이다 ..... 아직 젊고 그리고 영원히 소년처럼 깨끗할 듯싶은 이 시인(김용락)에게 더 나은 시와 삶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