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는 도반(刀瘢)을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빠르고 평평하다
묶어둘 수가 없으니 한사코 곡선을 버리지 못했다
밤새도록 저 물줄기가 예리하게 반짝이는 건
모래가 되지 못한 별들이 죽어
물빛이 되지 못한 나무들이 죽어
밝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금이 되었던 거다
그러니까 앞앞이 흘러가는 것들이 날을 간다
그 날에 찔리고 베인 물고기들이 가끔 죽는다고 했다
물고기들은 물줄기에 찔리지 않으려고
제 몸속 가시로 물결을 먼저 찌르고 떠서 지느러미를 깎는다
물살 뒤집어질 때마다
여러번 베이고 찔려도 죽지 않는 건 물소리다
일찍이 수면 바깥으로는 벗어난 적 없었으니까
물소리는 물소리로 도반을 숨기고 있으니까
이병일 시인의 "물소리는 도반을"은 자연의 흐름과 그 안에 숨겨진 고통, 생명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와 고통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시인은 물줄기와 물고기, 물소리를 통해 생명과 죽음, 고통과 생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연 속에 숨겨진 고통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을 성찰하게 됩니다.
※ 도반(刀瘢): 칼로 인해 생긴 상처의 자국. 물리적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나타내기도 함
나의 에덴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흘리고 싶어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
산부전나비 쫓다가 무심하게 건드린 벌집, 나는 또 캄캄하게 절벽으로 밀리고 급기야 날숨 희어질 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바위 그늘 밑 어스름을 좋아하는 모래무지가 되었다
도깨비불과 접신하기 좋은 나의 에덴! 깊은 산으로 가자, 미친 것들 푸르러지고, 죽은 것들 되살아나는 깊은 산으로 가자, 산빛에 젖어갈수록 나는 감감해지고 그림자는 쓸데없이 또렷해진다
이병일 시인의 "나의 에덴"은 자연의 깊이와 신비를 통해 인간 내면의 갈망과 고통, 그리고 치유와 재생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찾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고독과 고통, 그리고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표현합니다.
두부의 맛
갓 만든 두부의 속은 회오리치는 번개의 뿌리가 있어 혀를 델 수도 있으나, 반듯하게 칼금이 그어진 모서리를 희끄무레한 맛의 국경이라고 해두자
두부의 바깥은 잠잠하다 두부의 심장엔 무너지는 하얀 달이 있어 조용한 온기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 슬몃슬몃 기어나오는 수중기도 빤한 얼굴이라고 믿었다
저만치 두부의 맛이 창백하게 반짝일 때, 나는 밥상에 다정히 앉아 잇몸으로 두부 먹는 아이를 생각한다
어여쁜 손가락으로 두부를 누르는 아이는 두부 속에 숨은 몇개의 감정을 발견하였다 말랑한 힘이 품고 있는 기하학 혹은 컹컹 울다가 컹컹 짖지 않는 둥근 무늬랄까,
잇몸 속에서 앞니가 돌아날 때, 아이는 가장 말랑한 것이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다 손톱과 발톱이 자라듯이 차가워지는 이 희끄무레한 두부 앞에서 아이는 입을 크게 벌린다
이병일 시인의 시 "두부의 맛"은 단순한 음식인 두부를 통해 인간의 감정, 순수함, 그리고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깊이를 탐구합니다. 시인은 두부의 텍스처와 맛을 통해 감정의 복잡성과 삶의 섬세한 순간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두부의 바깥은 잠잠하다 두부의 심장엔 무너지는 하얀 달이 있어 조용한 온기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는 두부의 외부는 고요하지만 내부에는 따뜻함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 내면의 따뜻함과 순수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어여쁜 손가락으로 두부를 누르는 아이는 두부 속에 숨은 몇 개의 감정을 발견하였다"는 아이의 순수한 손길이 두부 속의 감정과 미묘한 변화를 발견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순수한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가장 말랑한 것이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다"는 아이의 깨달음은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장 강력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인간의 부드러운 감정과 순수함이 오히려 가장 큰 힘을 지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깊이와 아름다움을 성찰합니다.
골리앗 크레인의 도시
매캐한 소음을 둘러쓴 나는 눈에 기웃대는 꽃노을이 끔찍하다
수박만 한 머리통이 박살난 거미 인간의 기억이 방치되어 있다
나는 녹청으로 슬어가고, 뭉게구름은 나를 덥수룩하게 감춘다
계단이 많고 지붕마저 낮은 동네의 고개를 깎아
철심 기둥을 세우고 콘클;트의 옷을 입힌 빌딩들을 내려다본다
물고기 비늘을 가진 창들은 무료한 일상마저 아름답게 치장한다
어제는 흙탕물 쓰레기에 잠긴 잠수교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징그럽고 음산한 낙원을 꿈꾸는 좀비들이 몸부림치기도 했다
눈부신 죄수들을 보듯 저 오후의 도시는 온갖 소문을 묶는다
하루살이 귀신들은 간판 불빛을 꺾고 제 혼을 반짝반짝 태운다
찐득한 더위가 붙어 있는 밤의 젖가슴을 만지는 바람아
쇄도하는 관능에 몸의 감각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들아
가랑이를 한껏 벌린 지평선이 꺼내놓는 새벽아
가출할 궁ㄹ;를 찾아 여관에 몸을 심는 사춘기 소녀들아
내가 세워놓은 도시의 외곽으로 내밀한 생을 엎지르기로 하자
가장 먼 곳에서부터 어두워지는 무대의 조명처럼
나는 이 도시가 크리스털 광채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천공을 떠받치고 있는 골리앗 크레인, 모처럼 역광받는
매연은 내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아슬아슬 빛나고 있다
이병일 시인의 시 "골리앗 크레인 도시"는 현대 도시의 혼란과 부조리,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도시의 모습과 그 안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복잡성을 탐구합니다.
무릎이 빚은 둥근 각
나는 무용수의 세워진 발끝보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할 때의
여자의 무릎이 빚는 둥근 각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무릎부터 시작된 기도의 자세,
여자의 무릎은 점점 더 둥그렇게 휘며
정신은 수직에 가까워진다
예배당 열린 창의 커튼이 휘날리는데도
방석과 여자의 무릎 사이는 점점 깊어진다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무릎 속에 묻히고
감추어진 두 발은 엉덩이 밑에서 십자가가 되고
오늘도 여자는 어깨와 몸통을 비추는
빛의 기도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뼈와 뼈 마디마디를
온통, 주일 아침의 수면으로 잠그고 있다
여자는 우아하게 다리를 뻗고도 싶겠지만
기도를 위해
무릎의 둥근 시간을 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 혹은 저녁마다
어둠뿐인 곳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않는
여자의 무릎 기도,
꽃이 되고 꽃눈나비가 되고 하나님이 되어
어제 쓴 참회록을 들여다보고 있을 듯하다
그때 나는 기도에 집중된 여자의 무릎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둥근 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병일 시인의 시 "무릎이 빚은 둥근 각"은 기도하는 여자의 무릎을 통해 신앙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탐구합니다. 시인은 기도하는 자세와 헌신을 통해 내면의 경건함과 평화를 표현하며, 이를 통해 독자에게 신앙심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성찰하게 합니다. 이 시는 기도의 자세가 주는 경건함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합니다.
"족제비가 병아리를 물어가도 무섭지 않았던 날들을 생각한다. 나는 아무 탈 없이 자라길 바랐으나 벌집을 쓸데없이 쑤시고 다녔다. 호되게 쏘이고 낯달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흙을 만지고 사는 사람은 낮은 곳을 보고 살아야 한단고 말했다. 그렇다, 나의 시는 흙이 가진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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