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의 남편이야
이웃나라 북한여자와 결혼을 했어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린 이 옷 저 옷 팽개치고 속살로 만났지
아픈 허리 휘어감고 밤새 뒹굴었어
무에 더 필요 있을까
달덩이 같은 방뎅이 이렇게나 푸짐한데
요건 분명 외국산이 아니었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몇천번 핥아도
다시다시 엉기고 싶은데
요건 분명 먼 사람이 아니었지
무에 더 필요 있을까 난
밤새 간 칼날보다 예리하게 세워
다가온 오진 너에게 이몸 주고
무에 더 필요 있을까 넌
기다리다 지친 고운 몸 오늘사 활짝 여니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일
----- 난 너의 남편이야
해외토픽에서 떠들었어
신문마다 특종감이라 지껄였어
도망을 갔지
세상에서 가장 원수라는 나라
북한여자와의 결혼은
매국노보다 더 반역이기에 염병할
혼인신고는 두만강에 흘려보내놓고
숨었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뛰었지
38선을 넘어 그녀의 배꼽 위에서
그러다 그러다 덩더쿵 아들놈 하나 쑤욱 뽑아올렸지
우린 아이 이름을 하나라고 지었어
호적은 금강산 바위 밑에 파묻고는 뒤를 보았지
거기 반역죄로 살떨리는 우리들
산이란 산은 들이란 들은
섬진 낙동 두만 그리고
피멍든 망월동 묘역에서도 보일 우리들이 있는 거야
여기저기 버들가지 꺾은 매질 오살놈
떼쓰고 떼쓰고 죽여오는데
모가지 콱 옭아메는 날까지 쫓아오는데
우리들 사랑이 있는 거야 마침내 죽을 때까지
고 어린 자식 나를 보는 눈은
동지가 아닌 분명한 아버지인 사랑이
고 참한 여인 나를 보는 눈은
동무가 아닌 분명한 지아비인 사랑이
아 꿈 같은 무서운 꿈이었어
죽지 않은 우리들의 꿈이었지
----- 난 너의 남편이야.
<민의·1986>
오봉옥 시인의 시 '난 너의 남편이야'는 남북한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모든 것이 '꿈' 같다고 표현하며, 꿈 속에서도 현실의 고통과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 시는 사랑이 모든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며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한나절 공화국 - 아버지 8
화순 너릿재 지나 동복에 가면 산이 많아 다산이요 골이 깊어 원골이라는 부락들 있지요 헌데 거기 사람들은 같은 날 제사를 지내지요
글쎄 낮엔 군인이 밤엔 인민군이 점령하는 이른바 하루에 두 번씩은 공화국이 바뀐다는 한나절 공화국 때의 이야기지만
어느 날인가 부락주민들 모두가 갱변으로 끌려갔대요 그리곤 이미 파놓은 구덩이에 젊은네들 처넣더니 빨갱이 마을이라고 마구 총질을 했다지요
지금도 다산이나 원골 주민들은 같은 날 제사를 지내지요 그때 철없는 아이들만 무슨 명절이나 되는갑다고 좋아서 풀풀 뛰어다니고요.
오봉옥 시인의 시 '한나절 공화국 - 아버지 8'은 한국 전쟁 때 일어난 화순 지역의 민간인 학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는 한국 전쟁의 비극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통해 전쟁의 잔혹성과 무의미함을 강조하며, 집단 기억과 개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17596.html
https://hwasun.grandculture.net/hwasun/toc/GC05600543
산지기 일생 - 아버지 9
산지기 아비에 산지기 어미를 둔
나는 산지기다
가시나무 산출나무 짝도 지어주고
구봉산 쌍산을 한나절에 휘돌아오는
나는 역시 산지기다
여기엔 동무가 없다
다래나무 얇은 목을 뱀처럼 휘어감고
한나절 산씨름을 벌여봐도
푸른 산 한가운델 맘놓고 달리다
아무데서나 쓰러져보아도
가슴만이 오직 빈 가슴만이 꿈틀댈 뿐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산에서 살 뿐인
나는 산지기다
아랫마을엔 오씨들만 산다
난리를 겪을수록
아들 나고 딸 나고 오씨들만 산다
오씨네 장정들이 징용 가기 전까지는
밤 떠난 판석이가 배 갈려 죽었다고
핏빛 소문이 온 읍내를 거쳐
아랫마을로 흥건히 돌기까진
남은 아이들만 가끔씩
해골처럼 산에 올랐다
죽는 거 말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귀신 씌운 소문으로 아이들만 산에 올랐다
해방은 소문도 없이 왔다
오씨네 마을 삼밭에서
징징 우는 초가삼간 기슭에서
부러진 낫이나 녹슨 괭이에서
판석이 만석이 항석이도 없는
아낙만 남은 미친년 머리칼에서
나는 눈물도 없이 닦달을 했다
산지기 아비야 산지기 엄니야
새세상 왔다 하니 술렁술렁 갔다올께
한 일년 탄광촌에 박혀
논도 사고 장가도 갈께
여기엔 동무가 많다
읍네에서 너릿재 넘어 이서에서 온
땅도 없는 동갑내기여서
부르튼 큰 손바닥 야무지게 꼭 닯은
더러는 곰보 째보 내 동무요
더러는 언챙이 잰챙이 동무지만
모두 다 인민의 아들이어서
끝까장 더불어 살아갈 아들들이어서
여기 탄광촌엔 총소리가 가득하다
해방된 이 산하에
허기진 배 계속되고
때지어 풀캥이 칡캥이를 캐다 보면
배곯은 동무들이 빨갱이로 몰려붙이는
여기 탄광촌엔 총소리로 가득하다
저들은 적이다 하며
우리네 동무들이 무장하기 전까지는
산지기 아비야 산지기 엄니야
그래도 살아야 한다묜
싸워야 할 뿐인
나는 고작 산지기의 아들이었다.
오봉옥 시인의 시 '산지기 일생 - 아버지 9'는 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산지기의 아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는 개인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과 인간적인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산지기와 그의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상실을 보여주며, 특히 전쟁의 잔혹함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묘사합니다. 이 시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산지기의 아들이 겪는 고통과 애환, 그리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인간의 삶과 시대적 상황의 복잡한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과 2범 춘향이
변사또 취미가 걸작인즉
그중 하나로 춘향은 감옥에 갔겄다
아이고 아고 울며 좋아하는 월매도 그만
춘향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는디
거 감옥마다 젊은것들로 가득가득
아이고야 춘향은 공짜 밥 한술이 어렵다
월매 좋아하다 우는 꼴도 꼴이지만
요즘 이 마을엔 운동회니 뭐니 별별 잔치통에
큰손님 작은손님 자꾸만 굴러들어오는디
그 양반들 관광 하나 멋지게 해줬겄다
변사또 취미가 걸작인즉
동네사람들 다 불러놓고 관광객의 소감을 청한즉
거 볼 것이라곤 가는 디마다 하얗고 우렁찬
건물뿐이니 역시 이 동넨 백의민족답다고
그 건물이 무슨 건물이냐고 되물으니
변사또 차마 감옥이란 말을 못했것다
변사또 취미가 걸작인즉
잡드리한 죄인놈들 닮은 색깔이어야 쓴다고
하얗고 죄없이 지은 건물이었는디
인젠 백의민족이니 나발이니
당장 여러 색깔로 바꿔야 했으니
변사또 취미도 취미지만 고민일세
그러다 생각한 변사또 이야기 좀 보소
젊은것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서당이니 당산 아래니 모일 만한 곳엔
모도 못질을 해쌓더니
거기에 자기 몸땡이만한 수갑을 걸었겠다
근디 변사또 취미도 취미지만
글씨 더 질긴 것이 있었으니 좀 보소
남은 젊은것들은 모도 서당으로 모여쌓고
우리 춘향이도 서당에 입학할 거라니
어허 우리 춘향인 전과 2범일세.
<민의·1986>
오봉옥 시인의 시 '전과 2범 춘향이'는 전통적인 춘향 이야기를 비틀어 1980년대 대한민국 군부독재(군사정권) 시대와 그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남용을 고발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을 드러내며 현실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푸른 들 가운데 흰옷이 날리고 붉은 석양을 받은 누런 소가 마치 성난 소의 모습을 안으로 도사리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자연과 세상만사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동력 그 자체를 나타내게 합니다. 우리 역사에 핏빛 붉은 깃발로 몸부림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나는 나의 시가 그런 아버지들과 서고 그런 아버지들과 울고 웃는 것이어야 하며 끝내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봉옥 시인의 시집 <지리산 갈대꽃>에서 1946년 '화순 탄광 사건'과 이로 인한 입산, 빨치산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946년 화순 탄광은 전라남도 화순군 일대에 있던 탄광으로, 당시 삼척 탄광, 영원 탄광, 음성 탄광과 함께 채탄량이 많은 4대 탄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화순 탄광의 석탄은 주로 서울 등 대도시의 가정용 연료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소재의 전남 방직 공장의 연료로 공급되어 면직물 생산에도 영향을 줄 만큼 비중이 큰 탄광이었습니다. 1905년 화순 동면 대지주인 박현경이 화순 탄광을 열었으나 일제는 1934년 운영권을 빼앗았습니다. 해방 후 간부였던 일본인이 없어지자 노동자들이 자치위원회를 열어 스스로 운영했고, 일제 때보다 생산량이 더 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탄광을 관리하던 체제는 1945년 11월 미군이 도착하면 종식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종래의 종래의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을 일원화해 화순 탄광이란 이름으로 통합했습니다. 화순 탄광에는 광부 1,700여 명이 일했고 가족까지 포함하면 5,000여명이 화순 탄광에 의존해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 초 광부들은 높은 식량 가격에 비해 저임금에 시달렸습니다. 1946년 2월 일제 말의 식량 배급제를 부활 시켰고 이에 따라 광부들은 식량과 현금으로 임금을 제공받았나 노동 강도에 비해 여전히 배급량이 적고 임금도 낮은 수준으로 생활고를 겪었습니다. 1946년 8월 광주 지역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광복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광부들이 광주 지역과 화순 지역 경계인 너릿재 고개를 넘으려던 순간 미군이 총과 탱크를 앞세워 길을 막았고, 이로 인해 화순 탄광 노동자,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탄광 노동자들은 식량을 요구하는 생존권적 요구와 완전한 자주 독립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충돌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화순 탄광은 전남 지역의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로, 5.18 사적지 표지석, 광산 종사자 추모비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된 위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봉옥 시인은 <지리산 갈대꽃> 출간 1년 뒤인 1989년 이 탄광 노동자들의 궐기를 장편 서사시 <붉은 산 검은 피>에 오롯이 담아내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28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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