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와 먼 길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네
내 그대에게 채워줄 게 없었을 것이므로
물 한모금 나눠 마시면 싱겁게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네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시 "빈틈"은 인간관계에서의 결핍과 부족함이 오히려 관계를 깊고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임을 이야기 하며 인간관계의 본질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결함이 서로를 채우고 돕는 기회를 주어, 관계를 더 깊고 의미 있게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 한 모금 나눠 마시면 싱겁게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네"라는 표현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함께하는 순간들이 작지만 소중한 추억이 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빈틈"이 관계를 더 가깝고 친밀하게 만드는 즁요한 요소임을 강조하며, 완벽하지 않음이 관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감을 말합니다.
녹색어머니회
녹색어머니회 모자를 쓴다
녹색어머니회 노란 조끼도 입는다
호루라기 한번 불어볼까,
녹색어머니회 깃발을 들고
딸애와 함께 서둘러 학교로 간다
여기가 아빠자리야,
창피하게 하지 말고 잘해!
학교 정문 앞쪽에서
내 자리를 알려준 딸애는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오른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댄다
안년하세요, 인사하고 가는
저학년 아이들은 예브고 씩씩하다
엄마 손을 잡고 등원하는
병설 유치원 아이들은 마냥 귀엽다
삼삼오오 짝지어 오는
고학년 아이들의 걸음엔
여유가 있다 얼마나 애쓰세요,
처음뵈는 딸애 담임 선생님과
얼결에 다정한 인사를 나눈다
엄마는 바쁘잖아!
떨애는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라
나한테 녹색어머니회를 하라고 했다
아빠, 자꾸 장난칠 거야?
깃발을 그렇게 막 흔들면 어떡해,
녹색어머니회 엄마들이 하던 걸
아침마다 봤을 딸애한테서
길고 진진한 사전 교육을 받았다
드디어 등굣길 교통안전 활동을 마친다
큰 건널목 담당 녹색어머니회와
세탁소 삼거리 담당 녹색어머니회
엄마들과 인사를 나눈다 생애 처음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서 집으로 간다
이런 딸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 녀석이 서운해 하더라도요. "창피하게 하지 말고 잘해!" 꼬옥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싶네요. 부러워요.
리본 고양이 필통
나에게는 보라색 헝겊 필통이 있다
보랏빛 리본을 한 작고 하얀 고양이가
오른쪽 귀퉁이에 수놓여 있는 필통,
사년째 가방에 넣고 다니며 쓰고 있다
이 리본 고양이 필통의 원래 주인은 딸애다
초등학교 가던 날부터
4학년을 마치던 해까지 쓰던 특별한 필통,
그냥 두기에는 아까워서 내가 쓰기 시작했다
보랏빛 리본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니?
늘 같은 자리에 붙어 있는 하얀 고양이에게
너스레까지 떠는 날에는 필통이 더욱 좋아졌다
여전히 나는 연필 쓰는 걸 좋아하는 쪽인데
연필심이 잘 부러지지않아 더욱 애정이 갔다
필통 속에는 늘 필기구가 단출하게 들어 있다
연필 두자루와 귀퉁이가 둥글게 닳은 지우개,
0.7 검정 볼펜 한자루는 예비용이고
뭔가 잘못되었다 싶은 글을 고칠 때 쓰는
1.0 파란 볼펜도 빼놓을 수는 없는 귀중품이다
직장에 나가 무심코 필통을 열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연필이 세자루나 더 들어 있고
색깔이 다른 형광펜도 둘이나 눈에 띄었다
네임펜은 뭐고 새 지우개는 또 뭐지?
필통 안이 여느 때와 달리 풍성해져 있었다
음 그거, 아빠 필통이 너무 빈약해서 그랬어,
사춘기를 지나는 중2 딸애에게
좀더 나은 여드름약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얀 고양이의 리본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창피하게 하지 말고 잘해!" 하던 아이가 중2가 되었군요. 아빠에 대한 따뜻한 마음, 사랑은 변함없이 더 자랐군요, 이 만큼. 아이들은 어찌 그리 금방금방 자라는지요.
구절초 피는 마을
구절초가 또 구불구불 고개를 넘어온다
수달이 헤엄쳐 건너던 강물을 건너
오소리가 굴을 파던 산모투이를 돌아
삵이 불쑥 튀어나오던 비탈길을 지나
외딴 강마을 언덕에 무더기로 닿는다
덩달아 마을로 쏠려 왔던 아침 안개는
강물 소리를 따라 굽이굽이 쏠려 나가고
네발나비를 앞세우고 온 구절초만
강마을 솔밭 자락에 남아 짐을 푼다
가늘고 긴 목 내밀고
무더기무더기 피어나는 하연 구절초
핫따, 그새 또 와부렀능가? 외딴 강마을
사람들은 논밭으로 안 나가고
강변 솔밭 아래로 몰려나와 차일을 친다
이제야 비로소 네댓날 쉬는 가을,
핫따매, 맛이라도 보잔께! 휘휘
기름 둘러 전 부치는 손은 분주하고
콩 갈아 두부 만드는 손길은 야무지다
김이 풀풀 올라오는 찜통을 열면
모시송편과 모시개떡이 마침맞게 익어 있다
올 가실에는 유독 구절초가 하얗네 잉,
막걸릿잔 나눠 돌리며 마른 목 축인다
이내 구절초 구절재 넘어 돌아가고
외딴 강마을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불텅한 논둑길 밭둑길 따라 일 나간다
박성우 시인의 시 "구절초 피는 마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시는 구절초라는 꽃을 중심으로, 외딴 강마을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묘사하며 그 속에서 얻는 기쁨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봄 미나리
내 사는 집 아래에는 작은 방죽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다랑논이었으나 이제는
질척대는 흙이나 담고 있는 방죽,
한동안은 이장님이 가물치를 키우기도 했다
가시덤불이 우거져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방죽,
사람 발길이 아주 멀어지자
방죽은 미나리를 키우기 시작했지만
가시덤불이 어지간히 우거져서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루는 텃밭 모종을 하다가
윗집 할매가 가시덤불 틈으로
들어가다 돌아가는 걸 보고는
처마 밑에 걸어두었던 낫을 챙겼다
처음엔 손등만 긁혔으나 점차
팔목과 목덜미며 얼굴까지 가시애 긁혔다
낫으로 덤불을 내리치다가 검지를 찍기도 했다
그래, 끝장을 보자
가시덤불이 가고 봄밤이 왔다
두어날 뒤 점심 무렵,
밥상 차려 한숟갈 뜨려는데
윗집 너디 할먀가 왔다
입에 맞을랑가 모르겄네 잉, 할매 손에는
미나리무침 한대접이 들려 있었다
박성우 시인의 시 "봄 미나리"는 집 아래의 방죽에서 자란 미나리를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소소하고 작은 행복을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봄 미나리"는 자연 속에서의 작은 노력과 그로 인해 얻는 보답, 이웃 간의 따뜻한 나눔을 통해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기쁨과 감사의 가치를 담백하고 감칠 맛나게 담고있습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일사의 소소한 순간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과 기쁨이 되어주었던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은 아닌 순간들이 다시금
영화 속 빗줄기처럼 빗줄기처럼 선명하게 지나간다.
부디 어둠에서 빛으로 전해지기를
부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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