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허구헌 날 방구석에 처박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험회사를 다녔다는 말도 있고
중고차 매매센터를 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떤 말도 그의 말 뒤를 다 캐지는 못했다
태풍 볼라벤이 과실을 싹 쓸어간 뒤
풀밭인지 콩밭인지
가늠이 안 가는 신발에 그가 나타났다
시키잖은 풀을 뽑기 시작했다
밭고랑에 무릎 잇대고 뽑은 풀들
뿌리째 뽑혀서 시들시들해진 것들을
푹 썩어서 거름 되라는 듯
콩대 밑에 깔고는 했다
그래도 콩밭인지 풀밭인지
가늠 안되기는 매일반이었다
풀을 뽑다가 뽑다가 그야말로
흙좆이 된 그도 지쳤는지
허리를 쭉 펴며 한 말씀 내놓는다
“풀 말고도 뽑아버려야 할 것들이
이 세상에는 꼭 있는 것 같당게”
이 세상에 "풀 말고도 뽑아버려야 할 것들이" 딱 있으니 호미로 파내든 낫으로 싹둑 자르든 재초제를 확 뿌려 씨를 말리고 싶은 시절입니다.
바람 소리
1
소금물로 목을 헹구고 아랫배에 힘을 모아 소리를
감았다 풀었다 조였다 늘이빼어 작신 비틀어도
목에서 피가 터지지 않았으므로
바람 소리는 안주머니에 군용 수저를 꽂고
월요일 새벽마다 나를
서울행 고속버스에 태웠다
새벽차 안 타고 갈 것은 가고 남을 것은 남겠지만
어느 요일에 내려올 것이며 누구랑
언제어디서 먹고 마실 건지 따지다보면 잠이 쏟아지고
가슴에 이는 바람 소리가 잠결에도
이리저리 쏠리는 게 보였다
운일암반일암 계곡에 발을 헛디뎌 떠내려가다가
나무뿌리에 긁히는지 바위 밑에 처박히는지
정신없이 물살에 휩쓸리다가 흘낏
올려다본 하늘에 부르르 눈 뜨곤 했다
2
수십년을 같은 꿈이야 꾸었겠냐고
휴게소에서 멈췄던 버스는
토막잠을 떼내고 달렸다
자정 넘어까지 말품을 팔아야
빚도 갚고 먹고살 수 있다고
군용 수저로 파내던 밤을 떠올려도
배와 등이 맞붙어버린 바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피 빨아 먹다 지쳐 날지조차 못하는 모기들을
라이터불로 지지던 그 새벽을 까뭉개며
쓸개간장을 더 빼줘야 한다는 듯
순 명령쪼로 쌔앵쌔앵 버스는 달렸다
저 미친 속도로 나는 카수가 되고 싶었다 반지하 합숙소에서 칼잠을 자던 내 스무살, 누가 내 바지를 벗기고 뉘었는지 술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지분거리는 어떤 여카수가 나를 품었는지 포근했던 그 품은 넓고도 깊었다 머리 위에 서 숨이 고르게 오갈 때마다 여카수 가슴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곤 했다 허벅지가 포개어져 맨살이 맞닿은 데마다 온기가 굼실거렸다 이런 품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이런 품속에서 살아봤다는 듯, 더러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던 내 스무살을 기다렸다는 듯 그 품은 빨판같이 내 몸을 감싸고 죄었다 그럴수록 나는 몸을 더 작게 말아서 여카수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숨소리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여카수는 잠결인 듯 나를 더 끌어안으며 숨을 가늘게 끈어 쉬었다 내 숨소리가 끈끈해지고 포개어진 살결이 뜨거워지고 오줌이 마려웠지만 엄지발가락을 교대로 문질러가며 그 품에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아아 오선지에 끈적끈적 엉겨붙은 음표들은, 태산을 움켜쥐었다는 내 목소리는, 나에게 열광하는 수천수만의 관객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시간과 속도를 장착한 버스는
악보를 돌돌돌 만 종이 뭉치로
내 머리를 까대며 식식거렸다
도돌이표 못 미쳐 조용조용 숨을 얻은 불면증 같은, 구슬구슬 맺혀 샛눈 뜬 이슬문 털고 오소소 돋던 소름 같은, 흙 튀어 배긴 얼굴로 다가와 밥 먹었냐고 덜덜덜 떨던 할매의 눈빛 같은, 개 사타구니에 벼룩 끓듯 먹을 속이 똥속인 음표들을 매달고 버스는 쌔앵쌔앵 달렸다
다박솔 잔가지에 멧새알들을
고 작고 알록달록한 멧새알들을
날름날름 집어삼킨 잠 덜 깬 바람 소리가
쉴 곳 찾아 말을 더듬거리며
차창 밖을 자꾸만 내다보았다
이병초 시인의 시 **'바람 소리'**는 내면의 고통과 불안,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바람 소리'라는 은유를 통해 삶의 무게와 그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드러냅니다. "내 목소리는, 나에게 열광하는 수천수만의 관객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라는 구절에서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원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불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반지하 합숙소에서 겪은 신체적인 경험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여카수와의 신체적 접촉, 온기, 숨소리 등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순간의 육체적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이 경험은 단순한 신체적 접촉을 넘어, 젊은 시절의 갈망,혼란과 내면의 갈등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시인은 '잠 덜 깬 바람 소리'라는 표현으로 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나타내며, 끝없는 피로와 무력감을 묘사합니다. 이 시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강렬한 이미지와 은유를 통해 담아내고 있습니다. 바람 소리는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그 소리는 안정되지 못하고, 이는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상징합니다.
만남
들몰댁은 또렷하게 나를 기억했다
찜질복 아래 드러난 살진 무릎이 희디희디
내가 되레 무안했다 뭐 하고 사냐
자식은 몇이냐고 묻는 말 속엔,
어떤 놈 후리러 왔냐는 삿대질에 몰려 누런 백열전구 아래 빨래처럼 널브러졌던, 깜밥 달라고 생솔 냇내 묻어 있던 살결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그 품에 안겨 소리 죽여 눈물 흘리는 그 품에 안겨 가슴 두근거렸던 사십여년 저쪽이 걸어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코흘리개를 붙잡고
“아비 묻힌 데서 보면 저 멀리 고라니가 보리밭 일곱고량을 뛰어넘고 아지랑이가 나비수저로 팔랑팔랑 시냇물을 떠 먹었지야 털비지 근 반 잉걸불 뫼고 옻순에 싸먹음서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응게 아비는 나보다 덜 심심허겄다 이런 생각도 혔지야” 눈 깔고 얘기할 땐 숨이 가늘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던 아버지가 육이오 직후 소리개재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것과 그때부터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씨도 못 받고 호미품이나 팔며 떠돌았다는 것을,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런 사정을 다 짐작하는지
들몰댁은 입을 조금 벌리고 잠들어 있다
쓰린 속에서 터져나오는 약 기운에 취해
벼랑으로 달려가야지 살아갈수록 뒤가 허한 공복감을
보리개떡같이 물고 어금니를 깨물어야지
한증막 속에서 벌떡증 냈던
내 엄살을 빨아들이면 곤히 잠들어 있다
내 어머니였으면 참 좋아겠다고 생각했던 들몰
이병초 시인의 시 '만남'은 1950년 7월 20일 한국전쟁 직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민간인 1,400여명이 학살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과거와의 상처와 상실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연민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들몰댁의 이야기는 그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상징합니다.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상실과 고통은 인간의 연약함과 고독을 드러냅니다. 들몰댁과의 만남은 단순한 재회를 넘어 과거의 상처와 그로 인한 고독을 마주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만남을 통해, 인간이 겪는 상실과 고통, 그리고 내면의 갈등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https://www.jb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65
그해 여름
등에 여드름 짜낸 뒤 거길 혀로 찍어면 잠시 쓰라리다 이래야 손톱독이 빠진다고 혀 댄 자리를 소캐로 누르는 동안에도 매미 소리가 맹렬하게 끼어들었지만 지우개똥 불 듯 후후 불어내고 모기를 또옥 떠내듯 여드름 짜내고 거길 혀로 또 찍는다
그럴 때마다 숨구멍들이 더 오므라들고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눠도 머리카락만 남는 내 셈법은 더 바짝 오므라들고 야간일 나가려면 잠 좀 자둬야 하잖아? 응짜를 하면 희끄무레 앞섶을 열어 토실토실한 알젖을 물리는 가시내 혀에 데어 구멍이 뽕뽕 났을 여드름 자국을 손끝으로 굴리는 가시내
월남치마에 핀 꽃들 어르는 따옥따옥 따오기가 매미 소리에 파묻히기 일쑤여서 더 목이 말랐지만 끝내 여드름도 못 다스린 입추가 왔다
이병초 시인의 시 '그해 여름'은 무더운 여름날, 여드름을 짜내는 작은 행동을 중심으로, 그 속에 담긴 신체적 고통과 내면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토실토실한 알젖을 물리는 가시내"라는 표현에서 성적인 욕망과 호기심이 드러납니다. 매미 소리와 여드름 짜내는 반복적인 행위는 무더운 여름날의 지루함과 무기력을 상징하며, 성적 욕망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갈등을 보여줍니다. "목이 말랐지만 끝내 여드름도 못 다스린 입추가 왔다" 구절은 육체적 갈증과 더불어 심리적 불만족,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나타냅니다. 당돌한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윷놀이
으런 아그허는디 워떤 시러베아덜놈이 혼 삼베바지 불알 삐지디끼 요렇게 삐드러짐서 걸레방구 뀌고 지랄이냐잉 가래침으로 마빡을 뚫어버릴 팅게 혀고 자픈 말이 새벽 좇겉이 불퉁불퉁허드라도 쪼매 참어라잉
머라고랴? 쑤꾸 들어간 것까장 삼만원이 걸린 윷판인디 시방 우아래 따지게 생겼어라? 옛날얘기 꺼내는 놈치고 제 집구석 부잣집 아닌 놈 웂고, 미나리 새순 겉은 첫사랑에, 니롱내롱 외입질에, 지까짓 거시 열일곱명허고 맛짱 깠다는 칫수 아닌 놈 윲다더니 워너니 아제도 그 칫수라닝께 단박에 다섯 모 걸은 따논 당상일 것잉만, 내 참 드러서 똥 쌀 자리가 웂당게
근디 니 말버르장머리가 영 재수빡머리 웂게 진행된다잉 어린 새끼들헌티 아즉 상복 입힐 계제가 못됭게 냅두것다만, 아줌씨덜이 키 작다고 삐쭉거려도 어는새 흘레붙어 암캐 꽁무니에 질질 끌려감서도 고개럴 뻣뻣이 들고 그 예편네덜을 죽여주던 누렁이, 알 품는 씨암탉 물어 죽였다고 당 그래도 된통 얻어터져 콧잔등 짜부라진 진돗개 잡종, 너허고 사촌이디고 추어주닝게 니 말 싸가지가 영 좆밥이다잉
시발, 언지는 아재가 우떨헌티 밑밥 멧밥 챙겨줘봤간디 그려, 허벌창나게 다리 패대기만 헌 아재 눈치 봄서 아즉도 살으란 말여, 저런 순 싹동배기야 시방 처갓집 골방에 왔간디 뙤 허냐? 한발짝씩 언지 윷질을 따라잡겄냐 비까장 오는디 참말로 초상집 똥개마냥 멀뚱거릴래? 나 태어났을 때 머스마냐고 지지바냐고 물어봤다던, 머슴아다고 새 머슴이 태어났다고 고추금줄 쳤다던 그 불쾌헌 추억을 꼬랑창으다 확 처박으라고 혔냐 안혔냐, 디지는 거 아닝게 지내가는 그지가 장관 빽일 중 모릉게 할 말 허고 사라고 혔냐 안혔냐!
야 이 드렁배기야 내 얘기 들을래 작대기로 허리 걸칠래잉? 시방 내가 옛날얘기 허능 게 아니라 양놈덜 얘기 허잖냐, 긍게 사람이 흙 파먹고 살더라도 알 건 알고 살어야 헌다 이 말여 세삐또건 발바리건 똥개건 양놈덜 조상은 개가 분명허다 이 말여 양놈덜은 만나기만 허먼 보듬어쌓고 빨어쌓고 핥어쌓고 오도방정 개염병허능 거시 양놈덜 씨넌개가 분명하다 이 말여!
하이고 그려요? 근디 윷 놀다 말고 워디가 개창났간디 양놈들 똥고녁에다 입 처박고 입똥내 풍긴다요잉 쇠털 겉은 날들 다리품 쉬어가라고 모야, 뙤야! 깍쟁이윷에 세월 처박은 웃거티 개아제, 글먼 뙤개걸윷모 막질로 막 어크러진 우덜뜰 씨는 뭐다요 개년 꼴래붙으면 고개가 따로따론디, 글먼 양놈덜은 똥고녁으로 붙어먹것소잉?
"답을 캐러 붓질 괭이질이 쉽지 않아도 내 시는 우리 말씨에 엉겨 번지는 사람 냄새를 찾는 데 더 공력을 들여야 하리라.
모두가 겪는불편한 오늘을 어깨에 두르고 누가 밑불을 틔우는지 별들이 서쪽 하늘에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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