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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87

《니들의 시간》 김해자, 창비시선 494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려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뜅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퀴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 2024. 4. 17.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변혜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93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 인부는 먼저 공사를 진행 중이다. 푸른 초원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집을 짓는 것은 나의 오래된 소망이었 다. 벽돌로만 집을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나를 위 해 기꺼이 해주겠다고 인부는 내가 가진 것을 아주 조금 만 받겠다고 말해주었다. 땀을 흘리며 줄눈을 바르는 인 부의 목덜미가 아름답고, 부지런히 구름을 캐내는 희고 푸른 하늘이 아름답고, 이 모든 아름다움은 오후에 상장 했다가 저녁이 되면 폐지될 예정이다. 아름답다는 말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 각을, 생각을 그만두는 마음 한편에 앉혀두고서. 기다려. 얌전한 개가 된 생각애개 명령한다. 지급 대금을 공란으 로 남겨둔 인부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그 는 내게 첫눈에 반.. 2024. 4. 17.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창비시선 262 오누이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온느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대만 화푸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을 보니 눈물 핑 돈다 * '시.. 2024.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