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7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창비시선 476 뱁새 시인 수컷은 보폭이 커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알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자꾸 찢어지다보면 겹겹 새살이 돋을 거 아닌감. 그 새살이 고살 거시기도 키우고 가슴팍 근육도 부풀리는 거여.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보면 다리는 어찌 되겄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다리 길어지고 근육 차오르면 날개는 자동으로 커지는 법이여. 뱁새가 황새 되는 거지.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샛과여. 자네 고향이 황새울 아닌가?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들끼리 몰려댕기면 잘해야 때까치여. 그런데 수컷만 그렇겄어. 노래하는 것들은 다 본능적으루다 조류 감별사여. 시란 게 노래 아닌감? 이리 가까이 와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2024. 5. 8. 《슬픔이 택배로 왔다》 정호승, 창비시선 482 새해의 기도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주세요저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결코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그렇지만 올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올해도 저를 쓰러뜨려주세요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이제 아오니올해도 저를 거침없이 쓰러뜨려주세요그렇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주소서 올해도 저를 분노에 떨지 않도록 해주세요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그렇지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게 해주세요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세요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주소서무엇보.. 2024. 5. 6. 《김남주 농부의 밤》 김남주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래할 때나는 자유이다땀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 칠때 나는 자유이다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사람들은 맨날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제 자신을 속이고서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 등과 전국 최초로 반유신, 반파쇼 지하신문인 을 제작. 지는 주로 유신 독재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다뤘고 후에는 전국적인 신문으로 확산시키고자 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2024. 5. 5.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 《사월에서 오월로》 하종오, 창비시선 43 마음 마음먹은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상계동 골짜기 맑은 물이 되어서부모들 행상 나간 뒤 비탈진 골목에서흙 만지며 노는 아이들 깨끗이 씻어주고 봄날엔 홀연히 많은 고액권이 되어서삭월세 사는 주민들의 전세금으로혹은 너른 땅을 사서 골고루 나눠주어한 채씩 집을 짓게 하고겨울날엔 옷과 밥이 되어따뜻하게 지내게 해주고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전에 오늘밤에는중동취업을 꿈꾸는 남편들에게입사서류가 되어 배달되거나포장마차 마련을 꿈꾸는 아내들에게리어카와 연탄불이 되어 찾아가거나학교 못 다니는 쓸쓸한 소년소녀에게책이 되어 찾아가 공부하게 하고 그러나 마음먹는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한나절 싸우고 우는 아이들에게장난감이 되어 함께 놀다가사랑이 되어 포근히 안아주다가 하종오 시.. 2024. 5. 2. 《내일의 노래》 고은, 창비시선 101 공룡 20세기는 얼굴로부터사람의 얼굴로부터 시작했다그렇게도 무시무시한 시대였으나우리는뒷골목 여자의 얼굴까지도사람의 얼굴로 살아왔다제국주의반제국주의전쟁과 혁명그리고 파쇼그리고 학살과 착취이런 시대였으나그럴수록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그 20세기가 가고 있다 앞으로는 지난 세기와 다르리라다시 공룡의 시대가 오리라벌써부터 아이들은 공룡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사람의 얼굴은어디로 가는가 사람의 오류야말로사람의 멸망 바로 그것과 안팎인가오 21세기의 화가들이여 "공룡"은 시대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고찰합니다. 시는 20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적인 사건들, 전쟁, 혁명, 학살, 착취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얼굴이 존재하고.. 2024. 5. 1.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