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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87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창비시선 404 우주의 놀이 천년 고목도 한때는 새순이었습니다.새 촉이었습니다.새싹 기둥을 세우고첫 잎으로 지붕을 얹습니다. 첫 이파리의 떨림을모든 이파리가 따라 하듯나의 사랑은 배냇짓뿐입니다.곁에서 품으로,끝없이 첫걸음마를 뗍니다.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영원한 소꿉놀이를 하는 겁니다.이슬 비치는 그대 숲에서고사리손을 펼쳐 글을 받아내는 일입니다.곁을 스쳐간 건들바람과품에 깃든 회오리바람에 대하여. 태초의 말씀들,두근두근 옹알이였습니다.숨결마다 시였습니다.떡잎 합장에 맞절하며푸른 말씀을 숭배합니다. 새싹이 자라 숲이 됩니다.아기가 자라 세상이 됩니다.등 너머, 손깍지까지 당도한아득한 어둠을 노래합니다. 싹눈이 열리는 순간,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성장과 창조의 순환. 생명으.. 2024. 4. 25.
《야생사과》 나희덕, 창비시선 301 두고온 집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나희덕 시인의 두고온 집, 그 집은 무엇을 말하는지요? 집이 추우면 시인도 추워진다고, 시간과 거리에 의해 소원해진 존재,.. 2024. 4. 24.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창비시선 195 자격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홑씨 바람 타듯이, 생활을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집ㅇ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잃는 것 얻는 것에 별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받지 못하는 시 한편도 희고 붉은 피를 섞인 눈물로 쓰인 줄 아는 사람, 커다란 갓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 2024. 4. 2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창비시선 020 阿斯女 모질게 높은 성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 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 2024. 4. 20.
《 사이 》 이시영, 창비시선 142 어린 동화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아이가 젊은 엄마의 손을 이끌고 대낮의 쭈쭈바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느님이 뒤에서 방긋 웃다가 그 아이의 고추를 탱탱히 곧추세우자 젊은 엄마의 얼굴이 채양 사이로 빨갛게 달아 오른다 구례장에서 아침부터 검푸른 장대비가 줄기차게 오신다 천막 속에서 값싼 메리야스전을 걷다가 온 땅과 하늘을 장엄한 두 팔로 들었다 놓는 빗줄기를 하염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중년여인의 옆 얼굴이 빨갛다 오늘 같은 날 일요일 낮 신촌역 앞 마을버스 1번 안 등산복 차림의 화사한 할머니 두 분이 젊은 운전기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시우 젊은 양반! 오늘같이 젊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시구려. 그래야 산천도 다 환해진다우" 오늘같이 젊은 날, 마음껏 사랑하지요. 생업 통태 싸유..... 물.. 2024. 4. 19.
《荒地(황지)의 풀잎》 박봉우, 창비시선, 창비시선 005 素描(소묘) 33 우리의 숨막힌 푸른 4월은 자유의 깃발을 올린 날. 멍들어버린 주변의 것들이 화산이 되어 온 하늘을 높이 흔들은 날. 쓰러지는 푸른 시체 위에서 해와 별들이 울었던 날. 詩人(시인)도 미치고, 민중도 미치고, 푸른 전차도 미치고, 학생도 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의 얼굴과 눈물을 찾았던 날. 시인 박봉우는 분단의 비극과 아픔을 온몸으로 절규하던 시인이며 그 엄혹했던 시대에 통일을 지향했던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대한 울불과 격정을 삵이지 못하고 폭음과 방랑과 가난으로 점철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습니다. 심한 좌절의 시대에 갈등고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 암울안 말년을 맞이한 비운의 시인이었습니다. 김관식, 천상병과 함께 한국 시단의 3대.. 2024.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