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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87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김용택, 창비시선 0360, 2013년 4월 달콤한 입술 작은 물고기들이 등을 내놓고 헤엄을 친다보리밭에서는 보리가 자라고 밀밭에서는 밀이 자라는 동안산을 내려온 저 감미로운 바람의 발길들,달빛 아래 누운 여인의 몸을 지난다.달콤한 키스같이 전체가 물들어오는, 이 어지러운 유혹의 입술,오! 그랬어.스무살 무렵이었지.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 끝에서 있었어.어둠에 파묻힌 내 발목을 강물이 파갔어.비가 오고, 내 몸을 허물어가는 빗줄기들이 강물을 건너갔어. 그 흰 발목들,바람이 불면 눈을 감고 바람의 끝을 찾았지.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단내 나는 바람!나는 울었어. 외로웠다니까. 너를 부르면 내 전부가 딸려갔어.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렸어.그리움을 누르면 피어나던 어둠 속에 뜨거운 꽃잎들,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를 괴롭혔어. 집요했어.바위 뒤 순한.. 2024. 6. 2.
《깨끗한 희망》 김규동, 창비시선 0049 유모차를 끌며 그 신문사 사장은변변치 못한 사원을 보면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나오느냐고 했다유모차를 끌며 생각하니아이 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기저귀를 갈고 우유 먹이는 일목욕 시켜 잠재우는 일은책 보고 원고 쓸 시간을군말 없이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공연히 떼쓰거나마구 울어댈 때는 귀가 멍멍해서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되니이 경황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신기한 것은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때로 햇덩이 같은 웃음을굴리는 일이로다거친 피부에 닿는 너의 비둘기 같은 체온어린것아 네개 있어선모든 게 새롭고 황홀한 것이구나남북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거리고 자랄미국도 일본도 소련도핵폭탄도 식민지도 모르고 자랄통일조선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이 아이들 내일을 위해선우리네 목숨쯤이야 .. 2024. 6. 1.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윤룡, 창비시선 0035 까치밥 금방 떨어질 것 같은 빨간 홍시감나무 꼭대기에 한두 개 놀며 오가며 어린 시절목젓 떨어지게 바라보던 까치밥돌팔매를 쏘고 싶지만 참았던 까치밥쏘아도 쏘아도 맞지 않던 까치밥죽어도 안 떨어지는 까치밥 훈훈하고 고운 마음씨가지금도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옛날부터 감 따는 법을 칼로써 선포해했거나가르친 바도 없이 자연법이 생겨어떤 욕심장이 가난한 백성이라도까치들의 겨울 양식을 남겼으니 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어질고 순한 것이며없으면 안될 법은 저절로 씨가 떨어져울타리 안에, 동네 고샅에, 멧갓에이렇게 큰 법이 되어 열리는구나! 까치 까치 까치야,기다리는 봄동산기다리는 감격을언제 물고 오려는 것이냐,까치 까치 까치 까치 .....* 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골목 사이  멧갓: 나무를 함부로 베.. 2024. 5. 25.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0239 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나무와 나무가 모여어깨를 어깨를 대고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나무와 나무 사이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생각하지 못했다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나무와 나무 사이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산불이 휩쓸고 지나간숲에 들어가보소서야 알았다 는 20년 전 안도현 시인이 출간한 시집입니다. '간격'은 개별적인 나무가 자신의 공간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숲을 이루는 방식을 통해, 인간 관계에서도 각자의 독립성과 개인성을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편하게 느끼는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편안해 하는 거리.. 2024. 5. 25.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창비시선 0111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아냅니다수없이 많은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오늘도 이 거리에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구름처럼 다가오고 흩어지는 세우러 속으로우리도 함께 밀려왔단 흩어져갑니다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오늘도 먼 곳에 서 있는 당신의 미소를 찾아냅니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먼 길 속에서 당신은 먼발치에 있고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작게 있지만거리를 가득가득 메운 거센 목소리와 우렁찬 손짓속으로우리도 솟아올랐단 꺼지고 사그라졌다간 일어서면서결국은 오늘도 악수 한번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지만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수없이 많은 눈빛 속에서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이 시는 많은 사람들, 수많은.. 2024. 5. 21.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고운기, 창비시선 0208 모국어   학교 들어가 한글 겨우 깨쳤을 때, 한달에 한번 아버지에게 가는 어머니 편지 쓰는 일은 내 몫아 되었다.  천부적인 사투리의 여왕인 어머니가 불러주는 말들이 국어 교과서의 철자를 능멸하는 것이어서, 국민학교 일학년 실력이 감당하기 여간 곤혹스지 않았지만, 전쟁통에 혼자 된 어머니가 만난 아버지는 무슨 선물인 양 아이 하나 두고 멀린 떠난 다음. 곧이곧대로 받아쓴 사투리로 장식된 편지를 읽는 일이 한순간 즐어움이었단다.  무정한 아버지.침 묻힌 힘으로 살아나는 연필심이 어머니 고단한 세월으 가시 같은 아픔으로 돌아서서 어린 손끝을 찌르곤 했던 걸 아시기나 했을랑가.  내가 만났던 첫 모국어. 어머니의 언어는 떠나간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이 편지는 아이에게 힘든 일이지만, 어머니.. 2024.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