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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깨끗한 희망》 김규동, 창비시선 0049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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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를 끌며

 

그 신문사 사장은

변변치 못한 사원을 보면

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나오느냐고 했다

유모차를 끌며 생각하니

아이 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저귀를 갈고 우유 먹이는 일

목욕 시켜 잠재우는 일은

책 보고 원고 쓸 시간을

군말 없이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

공연히 떼쓰거나

마구 울어댈 때는 귀가 멍멍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되니

이 경황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신기한 것은

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

때로 햇덩이 같은 웃음을

굴리는 일이로다

거친 피부에 닿는 너의 비둘기 같은 체온

어린것아 네개 있어선

모든 게 새롭고 황홀한 것이구나

남북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거리고 자랄

미국도 일본도 소련도

핵폭탄도 식민지도 모르고 자랄

통일조선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이 아이들 내일을 위해선

우리네 목숨쯤이야 초로 같은 것이면 어떠냐

탄환막이라도 되어주마

우리를 딛고 일어서라

우리 시대는 틀렸다지만

너희들은 기어이 통일된 나라 만나리라

숨막히는 열기 속에 쫓겨 달리는

차량의 물결을 스쳐

미친 바람 넘실대는 거리를

삐걱이는 유모차를 끈다

통일을 만날 어린것을 태운

유모차 끄는 일은

시 쓰는 일을 미뤄두고라도

백번 눈물겹고 신나는 노동이구나.

 

김규동 시인은 정치에 있어서 여운형 선생 같은 인격의 보유, 문학에 있어서 김기림·정지용 같은 진보적 시인이 보여준 예술성의 고수를 중시하여 문학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모더니스트였습니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인환, 조향,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 당시 생명파와 청록하의 순수서정성을 비판하면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현실 속에서 인간존재의 황폐함과 현대문명의 한계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습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쉬르레알리즘에 경도하여 시론을 저술하고 영화 평론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7~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며 민중의식에 근거한 리얼리즘과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시를 쓰며 통일을 염원하였습니다. 남과 북이 당장이라도 전면전을 벌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절, 통일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남북 관계가 붕괴된 시대. 시인은 저 하늘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내려다보고 있을까요?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지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어째서

하늘나라에 계시지 않고

땅에 내려와

누님의 반지랑 쌀을 받아가시는가요

여러 천사를 거느리고

저 넓은 하늘 유유히 거니시며

가문 땅에 비를 주시듯

배고픈 이를 위해

넓은 사랑 나눠주시지 않고

와우동 산 몇 번지 그 교회에 내려와

아이들 돼지저금통이며

자질구레한 금붙이 따위 거둬가시는지요

물과 풀포기 하나 없는

사막의 고행길에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길을 떠날 때

쌀주머니와 짚신조차 지니지 말라

당부하신 그대시기에

가슴 울렁이는 곡절이 캄캄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겪는 지상의 비극을

어찌 감히 탓하오리까마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 긴하게 상의되어야 할 것이 있음을

어이 하오리까

부흥회서

밤새워 손뼉 치고 찬송을 한 누님은

정말 예수를 눈으로 보았다고 했다

예수는 두 팔을 벌려

세상 만물을 싸안는 인자한 모습으로

당신들은 이제 암흑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리라

너희에게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주노니

내 가르침을 받으라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예수를 본 누님은

그날부터 복음을 온 장안에 전파한다고

미친 듯이 나섰다

청산유수 같은 목사님의 열띤 설교를

귓전에 새긴 채

이 거리 저 거리에

하늘나라의 소식을 알리고 다녔다

마귀를 쫓아낸다고

나의 등을 세게 두드려준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나날이 계속하는 동안

어린것들은 끼니를 굶어야 했고

가난한 살림살이는 엉망이 되어갔다

우리집에 오면

교회에 가서 구세주를 만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아이들 팔을 잡아끌었다

드디어 광신자가 된 누님은

예수밖에 모르는 열렬한 사도였다

울분을 못 참은 아이들이 그 교회란 델 찾아가

목사님 장로님 나오라고 항의했으나

듣는 척도 안했다

금반지며 쌀가마 양복표도 내놓으라고

소리 소리 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종로 2가 지하도 어귀에서

백차에 실려

청량리 정신병원에 간 누님은

석 달 동안 꼼짝 못하게 묶여서

잠자는 약과 시래기국만 먹었다

면회를 가면

수면제를 너무 먹어서 퉁퉁 부은 희멀건 얼굴을 하고

다시는 교회에 안 가겠으니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어린애같이 빌었다

그 모습은 끔찍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오늘날도

수면제와 진정제를 썩어 먹으며

죽은 사람처럼 그녀는 살아간다

군고구마 봉투를 안고

오늘 누님이 다녀갔다

누님 요즈음도 약 먹어요

조용히 내가 물으면

하 표정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는

자꾸만 살이 쪄서 살 수 없다고 사정을 한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님은 이제 약을 그만 먹어야 하는데

금반지와 바꾼 약치곤 너무 많은

그놈의 약을 끊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죽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예수님께 빌었다

주님, 당신께서 정말 여기 와 계시다면

법 없이도 살아갈

누님을 왜 이처럼 괴롭히십니까

그녀는 착한 여잡니다

누님이 옛날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같이 한번 빌어보는 것이었다

메꿔도 메꿔도 메꿔지지 않는

백주같이 환한 내 부채의 구멍 앞에서.

 

재림 예수가 수천 수백은 살고 있는 대한민국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맞는다고 하는 목사님 내 앞에서 벗으라면 입고 있는 빤스도 다 벗어야 한다는 목사님 주님의 사랑의 정표라고 자지를 깊숙이 넣고 정액을 뿌리며 천국에 이르렀다고 축복을 하는 목사님 높거나 낮거나 임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임해서 줍줍줍 먹성 좋게 먹는 구세주들 이생의 천국에 이르겠다고 저승의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금은보화 똥 묻은 빤스까지 가져다 바치고 몸도 마음도 영도 바치는 어린 양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 모두를 성전에서 내쫓고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터로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 하는 순간 적그리스 감별사들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재림 예수들과 구세주들은 예수를 불순하고 불온한 반사회적인 죄를 적용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한강 둥둥섬에 세워고 오물과 돌을 던지며 희롱하며 까불면 네 아버지도 엉덩이 까여서 피 터지게 맞아 그곳에서 주는 기도나 잘 받고 축복이나 하라고 해 네 아버지 불러봐라 정말 혼지검을 내줄테니 너는 네가 좋아하는 낮은 곳에 찌그러져 있어 콧물 훌쩍 거리고 눈물을 찔금 훔치던 네 자유 단 고개 들면 목이 댕겅 댕겅 세상을 구원하기엔 우리들 자리도 부족하니 줍줍줍

 

 

노래 - 挽歌(만가)

 

빗발이 듣는 세느강엔

둥둥 떠가는 가마니와 함께

황소 머리를 닮은

몇 개의 뿔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마 소리는

강심 깊이 잦아들고

피에 얼룩진 여러 개의 선언이

전봉준의 핏발선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노틀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나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를 몰고 온

앙드레 브르똥의 야유와 공격 때문에

세느강 황토빛깔 우수를

퍼담는 일을 종내 포기해야만 했다

엷은 입술에 빗물을 물고

보들레르가

콧소리로 모음자 발음만 하묘

급진사상에 대하여

모종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떠올랐다

서둘러 흐르는 강심에

성난 뿔은 잠겨지고

강변의 노점 책방은 닫혔는데

잉어들은 흙탕물 속에서도

빠리의 투명한 지성을

미인들의 회색빛 겨드랑 사이로

멀리멀리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월이 세느강에 흐르고

말하지 않는 죽음과 사랑도

긴 역사의 다리 아래를 흘렀다

흰 돌들과 늘어진 가로수를 스쳐

서편 하늘을 비껴가는

암울한 만가를 물결에 뒤썩으며.

 

* 만가: 상여를 메고 갈 때 하는 노래, 죽은 이를 애도하는 시가

 

시인은 '노래-만가'에서 나폴레옹의 군마 소리, 전봉준의 핏발 선 눈, 앙드레 브르똥의 야유와 공격 등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 프랑스와 한국의 역사적 고뇌외 갈등을 상징적으로 노래합니다. 시인은 변화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흐르는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김규동 시인은 1925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48년에 스승인 김기림 시인을 찾아 단신 월남했습니다. 2011년 9월 28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북에 계신 어머니와 누이들과 남동생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였습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여, 어머니가 자신과 상봉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아들에게 편지로 들려주는  꿈을 꾸었나 봅니다.

 

  8·15해방 이후 50년대의 10여 년에 걸쳐 모더니즘이 이 땅의 시를 위해 낡은 전통주의를 극복하고 인류의 새 세계와 만나는 길이라는 신념 밑에 쉬르를 중심한 문학운동에 경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사와의 막연한 접촉과 교류라는 흐름에 있어선 어떤 의의를 지녔을지 몰라도 내가 사는 당면한 민족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우리의 모더니즘이 절름발이 구실밖에 못했다는 사실을 아울러 느끼게 되었다. 이 땅의 시인인 이상 분단이라는 다급하고 절실한 문제를 떠나서 존재의의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과 목을 조이는 분단의 사슬을 문제삼지 않고는 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후 나의 시의 방향은 억압에 저항하여 싸우는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있게 되었으며 나는 이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 1985년 3월 김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