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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0239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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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를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소서야 알았다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는 20년 전 안도현 시인이 출간한 시집입니다. '간격'은 개별적인 나무가 자신의 공간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숲을 이루는 방식을 통해, 인간 관계에서도 각자의 독립성과 개인성을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편하게 느끼는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편안해 하는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여정이라고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간격'의 서로에게 필요한 공간과 자유를 제공한다는 깊은 이해와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겠지요.

 

 

월광욕(月光浴)

 

이즈막에 꿈이 하나 있다면

인적 없는 지리산이나 설악산 자락쯤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입고 온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평평한 바위 위에 한시간쯤

드러누워 있는 것

 

하늘에서 천천히 기어내려온 달빛 벌레가

내 귓바퀴며 겨드랑이며 허리며 사타구니를 마음껏 갉아먹도록

사지를 있는 대로 벌리고 누워 있는 것

마치 혼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형상이겠지

 

달빛 벌레가 내 몸을 갉아먹다가 지치면

바람 여자가 내 정신을 혓바닥으로 맛있게 핥아먹을 수 있도록

내 꿈은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주는 것

따끔거려도 간지러워

태연한 척 참는 것

 

훌렁 벗고 드러눕기만 하면

내 욕망이며 희망이며 흉터도 갉아먹고 핥아먹어주겠지

너도 그떼 같이 가보지 않으련?

 

글쎄, 지구별 생명체가 모두 일시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고 퉤퉤 하지 않을까? 못 볼 것 보았다고. 아무데서나 훌렁훌렁 벗지 마시길.

 

 

왜가리와 꼬막이 운다

 

바다의 입이 강이라는 거 모르나

강의 똥구멍이 바다 쪽으로 나 있다는 거 모르나

입에서 똥구멍까지

왜 막느냐고 왜가리가 운다

꼬들꼬들 말라가며 꼬막이 운다

 

그렇지요. 저 강과 바다를 가르는 사람들아 네 똥구멍을 막으면 며칠을 살 수 있겠니? 며칠을 견딜 수 있겠니? 그 탐욕의 혀를 낼름낼름 거리다 네 똥구멍 막혀 배 터져 죽는 걸 잊지마시길.

 

 

앵두의 혀

 

앵두를 먹었지

그러니까 작년 여름

툇마루 끝에 앉아 먹었지

 

한알 한알이 예뻐서

한알 한알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거 왜 있잖아, 시기도 하고 달기도 한 연애 같은 앵두를

흰 쟁반 가득 따다가 놓고서는

손가락으로 한알 한알 골라 먹었지

앵두즙이 잇몸 속까지 적셔서 처음에는 찔끔 진저리치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언제 이 앵두를 다 먹고 싶어서

한움큼씩 입에 털어넣듯이 먹었지

아무리 입에 우겨넣어도 볼이 불록해지지 않는 것은

앵두알을 씹는 사이, 그 어느 틈에

씨앗을 발라 뱉는 기막힌 혀가 있기 때문

거 왜 있잖아, 앵두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을 때,

양두알을 깨물어 입안에서 환하게 토도독 터져서는 물기 번질 때,

하루 내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장차 내 인생이나 네 인생에 쉽사리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앵두를 먹을 때,

 

툇마루 끝에 앉아

앵두를 먹었지

앵두씨를 툿, 툿, 툿, 뱉어가며 먹었지

그런데 있잖아, 앵두씨에도 혀가 있다는 말 들어봤나?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혀끝으로 발라 우리가 마당에다 내뱉은 만큼

앵두씨가 자기를 밀어올리는 것 봤나?

지금 앵두의 혀가

날름날름 연초록 바람을 골라 먹고 있다니까!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서 먹던 그 빨갛고 자그마한 구슬들, 어느 해인가는 할머니집 앵두나무에 벌레가 많이 생겨 앵두가 조금밖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했었지. 앵두같은 입술 안쪽 앵두의 입술은 어떤 느낌일까? 달콤하고 시고 상큼하고 상쾌한 맛?,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질 맛? 아니면 핏줄이 일어 서는 맛?

 

 

주름

 

  평양 대동강변에서 만난 오영재 시인은 앞에 놓인 도시락을 열지 않았다 륭성맥주만 연거푸 몇잔 들이켰다 8월의, 나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나무 그늘 아래 우리는 둘러앉아 젓가락으로 밥덩이를 뜨면서 나는 나무 그늘의 주름 사이를 천천히 건너가는 선생의 목소리에 내 귀를 걸어두고 있었다

 

  북의 계관시인은 남쪽에 사는 피붙이들과 시인들에게 전해달라면서 두어 장 메모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처럼 손이 하얗지는 않았다 울음 그친 매미들이 필체를 힐끗 보다가 다시 세차게 울었다 선생도 웃는 듯 우는 듯하였다 그때마다 이마의 주름이 퍼졌다 접혔다 하였다 한반도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던 주름의 골짜기가 거기 다 들어 있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월 25일 강진을 점렴한 인민군이 의용군을 강제 징집했습니다. 다른 세 형제들을 대신해 16살의 오영재 시인이 의용군에 자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한 살 난 여동생을 입고 70리 초행길을 8월의 폭염도 아랑곳하지 않고 70리 의용군 수용소까지 걸어왔다고 합니다. "너 잘 있는 것 봤으니 됐다". 그때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어둑어둑 해지는 길을 되돌아가시던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낙동강전투에 투입되었다가 북녘으로 후퇴해서 줄곧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서울에서 남쪽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005년 남북민족작가대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하는 등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활발한 남북교류에 참석했으며, 2011년 10월 23일 갑상선암으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https://www.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7687)

 

 

늙지 마시라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

내 백발이 된다 해도

어린 날의 그 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이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치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새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출처: https://www.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7687, 강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