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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고정희, 창비시선 0077 (1989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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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거리 - 축원마당

여자 해방염원 반만년

 

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

 

어머니여

마음이 어질기가 황하 같고

그 마음 넓기가 우주천체 같고

그 기품 높기가 천상천하 같은

어머니여

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

인간세계 본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살고 죽는 뜻은 

팔만사천 사바세계

어머니 품어주신 사랑을 나눔이라

 

그 품이 어떤 품이던가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인 세월

홍수 같은 피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이어지는 피눈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열 손가락 앞앞이 걸린 자녀

들쭉날쭉 오랑방탕 인지상정 거스르는

오만불손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문전옥답 뼈빠지게 일구시느라

밥인지 국인지 절절끓는 모진 새월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거두신 것 가진 것 다 탕진하는

오만방자 거드름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밤인가 낮이런가 칠흙 깜깜절벽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세월

인생무상 희생봉사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하늘이 높아 알리

땅이 깊어 알리

 

고정희 시인의 시 '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시는 인간의 시작을 어머니의 자궁으로 표현하며, 그곳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라납니다. 어머니는 곧 인간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자녀의 방황과 실수에도 어머니는 끝없는 인내와 헌신을 보여줍니다. 그 희생덕분에 자녀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는 어머니의 넓고 깊은 사랑을 통해 인간의 근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둘째거리 - 본 풀이 마당

여자가 무엇이며 남자 또한 무엇인고

 

천황씨 속에서 여자가 태어날 제

 

아하 사람아

여자가 무엇이며 남자 또한 무엇인고

바늘 간 데 실 가고

별 뜨는 데 하늘 있듯

남자와 여자가 한짝으로 똑같이

천지신명 속에 든 사람인지라

천황씨 속에서 여자가 태어나고

지황씨 속에서 남자가 태어날 제

지황씨와 천왕싸 둘도 아닌 한몸 이뤄

천지공사간 맞들고 번창하고 운수대통하야

천대 만대 사람의 뜻 누리라 하였을 제

여자 남자 근본은 제 안에 있는지라

사람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

팔만사천 사바세계 생로병사

어머니 태아 주신 융기를 나눔이라

태산의 높이를 헤아려

어머니 닦아주신 대동을 받듦이라

영락없는 동지요 영락없는 배필삼아

속았구나 하면서 속지 않고

밟혔구나 하면서 밟히지 않는

어머니 품어주신 생명을 지킴이라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고

내처 안타깝지 않은 목숨 없는

어머니 길러주신 존엄을 누림이라

 

고정희 시인의 시 '천황씨 속에서 여자가 태어날 제'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과 상호 의존을 노래합니다. 남녀는 서로 보완하며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존재로, 그 본질은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에 있습니다. 이 시는 남녀가 각자의  역할을 맡아 어머니로부터 받은 생명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책임을 깨우쳐줍니다.

 

 

억조창생 강물로 흘러가게 하사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해방된 남녀끼리

쟁반에 물 담은 듯 화반에 꽃 담은 듯

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백으로

받들어주며 껴안아주며

기대주며 밀어주며

맺힌 고는 풀어주고

갇힌 문은 열어주고

상하좌우 귀천없이 남녀노소 우열없이

순풍에 돛달고 초원에 말 달리듯

부끄럽다는 사람 부끄러운 성미대로

활달함 많은 사람 활달함 많은 대로

능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대로

어리숙한 사람 어리숙한 천성대로

생사고락 맞들며 윗돌 되고 아랫돌 되어

평등평화 자유민주 누려 살게 하사이다

귀한 남자 귀한 여자

차별없이 부정없이

투기없이 폭력없이

통일조국 성취하야 백두 연봉 보듬을 제

해방 여손 자손 앞앞이 북돋우사

억조창생 강물로 흘러가개 하사이다

어머니강물 우리 강물 흘러가게 하사이다

( ___ 어 쳐라, 어머니강물 나가신다)

 

고정희 시인의 시 '억조창생 강물로 흘러가게 하사이다' 는 남녀 간의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을 그립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평등, 화합, 차별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합니다. 그리고, 차별없는 사람들이 통일된 조국에서 모두가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섯째거리 - 길닦음마당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으니

 

오늘날 어찌하여 우리 길이 막혔는고 하니

 

<매기는 소리>

오늘날 어찌하여 민주길이 막혔는고 하니

복종생활 순종생활 굴종생활 '석삼종' 때문이라

여자팔자 빙자해서 기생 노릇 하는 여자

현모양처 빙자해서 법적 매춘 하는 여자

사랑타령 빙자해서 사치놀음 하는 여자

미모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가정교육 빙자해서 자녀차별 하는 여자

남편출세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남자신분 빙자해서 투기노름 하는 여자

전통 빙자해서 자기비하 하는 여자

학벌 빙자해서 무위도식 하는 여자

삼종지도 빙자해서 천리까지 기는 여자

부창부수 빙자해서 청맹과니 되는 여자

부계혈통 빙자해서 창씨개명 하는 여자

나약함 빙자해서 홀로 설 수 없는 여자

 

<받는 소리>

아차, 하녀 신세로구나

아차, 노예 신세로구나

몰랐더냐 몰랐더냐 몰랐더냐

후천개벽 평등세상 도래를 몰랐더냐

"이 시집에서 나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어머니의 혼과 정신'을 '해방된 인간성의 본'으로 삼았고 역사적 수난자요 초월성의  주체인 어머니를 '천지신명의 구체적 현실'로 파악하였다. 눌린 자의 해방은 눌림받은 자의 편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 이런 숙제를 안은 채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번의 지리산 종주 등반길에서 나는 이 시편을 연달아 착상했고 내 일생에서 처음인 '45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그 구상을 끝냈으며, [여성신문]의 창간작업에서부터 1년에 이르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새벽으로 새벽으로 이 시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쓰는 데만 꼭 만 9개월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