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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74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
《사월에서 오월로》 하종오, 창비시선 43 마음 마음먹은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상계동 골짜기 맑은 물이 되어서부모들 행상 나간 뒤 비탈진 골목에서흙 만지며 노는 아이들 깨끗이 씻어주고 봄날엔 홀연히 많은 고액권이 되어서삭월세 사는 주민들의 전세금으로혹은 너른 땅을 사서 골고루 나눠주어한 채씩 집을 짓게 하고겨울날엔 옷과 밥이 되어따뜻하게 지내게 해주고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전에 오늘밤에는중동취업을 꿈꾸는 남편들에게입사서류가 되어 배달되거나포장마차 마련을 꿈꾸는 아내들에게리어카와 연탄불이 되어 찾아가거나학교 못 다니는 쓸쓸한 소년소녀에게책이 되어 찾아가 공부하게 하고 그러나 마음먹는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한나절 싸우고 우는 아이들에게장난감이 되어 함께 놀다가사랑이 되어 포근히 안아주다가 하종오 시.. 2024. 5. 2.
《내일의 노래》 고은, 창비시선 101 공룡 20세기는 얼굴로부터사람의 얼굴로부터 시작했다그렇게도 무시무시한 시대였으나우리는뒷골목 여자의 얼굴까지도사람의 얼굴로 살아왔다제국주의반제국주의전쟁과 혁명그리고 파쇼그리고 학살과 착취이런 시대였으나그럴수록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그 20세기가 가고 있다 앞으로는 지난 세기와 다르리라다시 공룡의 시대가 오리라벌써부터 아이들은 공룡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사람의 얼굴은어디로 가는가 사람의 오류야말로사람의 멸망 바로 그것과 안팎인가오 21세기의 화가들이여 "공룡"은 시대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고찰합니다. 시는 20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적인 사건들, 전쟁, 혁명, 학살, 착취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얼굴이 존재하고.. 2024. 5. 1.
《꿈의 페달을 밟고》 최영미, 창비시선 175 그 여름의 어느 하루   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구살, 달걀..... 종이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게 마련이다. 아, 참기름이 떨어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2024. 5. 1.
《벽 속의 편지》 강은교, 창비시선 105 벽 속의 편지 - 그날 이 세상 모든 눈물이이 세상의 모든 흐린 눈들과 헤어지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이 세상의 모든 곪는 살들과 헤어지는 날 별의 가슴이 어둠의 허리를 껴안는 날기쁨의 손바닥이 슬픔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날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 그대, 아직길 위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는 이여. 강은교 시인은 별이 어둠을 안아주고, 기쁨이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날,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에도 끝없는 희망과 사랑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에서 사랑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 2024. 5. 1.
《이별의 재구성》 안현미, 창비시선 306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하게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봄비 내리는 밤 복숭아꽃(桃花, 도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도화주에 취하고 싶은 4월의 봄입니다. * 와유(臥遊):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臥遊山水(와유산수)는 옛 선비들이 방 안에 산수화를 걸어 놓고 누워서 상상 속의 절경 유람을 즐겼던 것을 뜻합니다. 이 별의 재규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나하고 나 사이에 늙고 엉뚱.. 2024.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