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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74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이근화, 창비시선 402 대파에 대한 나의 이해   대파를 샀다.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있었지만 대파를 샀다. 굵고 파랗다. 단단하고 하얗다. 맵고 끈적끈적하다. 대파다. 흙을 털고 씻었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큰 칼을 들고 대파를 썰 차례다. 억울하면 슬픈 일을 생각하면 좋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대파니까. 시장바구니에 삐죽 솟아오른 것이 대파였다. 설렁탕도 골뱅이도 없이 대파를 씹는다. 미끈거리고 아리다.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대파여서 뿌듯하다. 종아리 같은 대파였으니까. 파밭의 푸른 기둥이었으니까. 뿌리를 화분에 심으면 솟아오르는 대파니까. 허공에 칼처럼 한번 휘둘렀으니까. 대파하고 파꽃이 피고 지면 알게 될까. 대파를, 뜨거운 찌개에 올려 숨 죽인 대파의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까. 대파를 어떻게 만들 수.. 2024. 4. 28.
《밥상 위의 안부》 이중기, 창비시선 206 는 경북 영천에서 복숭아 농사 등을 지으며 시를 쓰고 있는 이중기 시인의 시를 모아 2001년 출간한 시집입니다. 한국 농촌도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특히,  1997년 국가 부도 사태와  IMF 구제 금융 시대,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는 농촌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고, 많은 농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97년 이후 농산물 가격 하락과 내수 시장의 침체, 농촌 인구의 감소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사과 수출도 영향을 받아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과수원 운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무렵 이중기 시인도 키우던 사과 밭을 갈아엎었습니다. 풋것이 돈이 된다  나, 매음굴 하나 알고 있네초록은 날것의 상쾌함을 가져사내들 풋것.. 2024. 4. 27.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창비시선 204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어찌할 수 없이서서 노을 본다노을 속의 새 본다새는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노을은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나를 떠메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저 노을 탓이다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중얼거리며조금씩 조금씩 저문다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모두 모여서 가지런히잦아드는 저것으로할 수 있는 일이란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덮어보는 일이다그렇게 한번 더퍼보는 것뿐이다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해남 들에 뜬 노을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개로 와서내 뒤의 긴 그림자까.. 2024. 4. 2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창비시선 404 우주의 놀이 천년 고목도 한때는 새순이었습니다.새 촉이었습니다.새싹 기둥을 세우고첫 잎으로 지붕을 얹습니다. 첫 이파리의 떨림을모든 이파리가 따라 하듯나의 사랑은 배냇짓뿐입니다.곁에서 품으로,끝없이 첫걸음마를 뗍니다.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영원한 소꿉놀이를 하는 겁니다.이슬 비치는 그대 숲에서고사리손을 펼쳐 글을 받아내는 일입니다.곁을 스쳐간 건들바람과품에 깃든 회오리바람에 대하여. 태초의 말씀들,두근두근 옹알이였습니다.숨결마다 시였습니다.떡잎 합장에 맞절하며푸른 말씀을 숭배합니다. 새싹이 자라 숲이 됩니다.아기가 자라 세상이 됩니다.등 너머, 손깍지까지 당도한아득한 어둠을 노래합니다. 싹눈이 열리는 순간,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성장과 창조의 순환. 생명으.. 2024. 4. 25.
《야생사과》 나희덕, 창비시선 301 두고온 집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나희덕 시인의 두고온 집, 그 집은 무엇을 말하는지요? 집이 추우면 시인도 추워진다고, 시간과 거리에 의해 소원해진 존재,.. 2024. 4. 24.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창비시선 195 자격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홑씨 바람 타듯이, 생활을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집ㅇ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잃는 것 얻는 것에 별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받지 못하는 시 한편도 희고 붉은 피를 섞인 눈물로 쓰인 줄 아는 사람, 커다란 갓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 2024.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