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더퍼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개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 떠매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해남 들판 끝에 지는 노을, 그 노을이 시인을 찾아왔군요. 노을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가치, 그 순간을 통해 일상의 번잡함을 넘어 자기 성찰과 내적 치유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숟가락
가루 커피를 타먀 무심히 수저통에서 제일 작은 것이라고 뽑아들어 커피를 젖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 밥숟가락이다 그 숟가락으로 일부러 않던 버릇처럼 커피를 홀짝 떠 삼킨다
단가 쓴가
가슴이 뻐근하다
빈집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발치에 와 있는 햇빛
커피 한잔 주고 싶다
숟가락에 커피 홀짝 떠 삼킨다. 그러나 외로움일까 그리움일까 그 달달한 쓰디쓴 맛을 느끼지 전에 가슴부터 뻐근해질까 발치에 와 있는 햇빛과 커피 한잔 소소한 삶의 깊이를 나눌 수 있을까
빗소리
새벽녘에 빗소리 들렸다
부스럭대며 일어나 베란다에 나간다
비 들이치지 않을 만큼
바깥창 기울여 닫고
뒤창에 가 또 닫고 다시
들어와 문 닫고 앉았다
빗소리는 멀어졌다
앉아 엊그제 소란스레 피었던
철쭉분의 꽃들 다 어디 갔나
뒤늦게 생각한다
손바닥을 펴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슴께를 만져보기도 한다
베란다에 내가 잠깐 신었던
낡은 신 한 켤레가
흩어져서 뒹굴고 있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인, 그 소소함에서 삶을 성찰하고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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