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놀이
천년 고목도
한때는 새순이었습니다.
새 촉이었습니다.
새싹 기둥을 세우고
첫 잎으로 지붕을 얹습니다.
첫 이파리의 떨림을
모든 이파리가 따라 하듯
나의 사랑은 배냇짓뿐입니다.
곁에서 품으로,
끝없이 첫걸음마를 뗍니다.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영원한 소꿉놀이를 하는 겁니다.
이슬 비치는 그대 숲에서
고사리손을 펼쳐 글을 받아내는 일입니다.
곁을 스쳐간 건들바람과
품에 깃든 회오리바람에 대하여.
태초의 말씀들,
두근두근 옹알이였습니다.
숨결마다 시였습니다.
떡잎 합장에 맞절하며
푸른 말씀을 숭배합니다.
새싹이 자라 숲이 됩니다.
아기가 자라 세상이 됩니다.
등 너머, 손깍지까지 당도한
아득한 어둠을 노래합니다.
싹눈이 열리는 순간,
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
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성장과 창조의 순환. 생명으의 시작과 성장, 사랑의 고백과 숭배의 순간들 지구별 생명들이 펼치는 우주적 놀이입니다. 바람 사이로 살며시 내려앉은 봄비, 자그마한 입술로 쪼옥쪽 빨아 동그래진 볼, 뽀얀 연두색을 하고 있는 4월 봄, 그 우주의 놀이가 경이로운 때입니다.
꽃은 까지려고 핀다
잘 터져야 한다.
씨앗이 말했다.
잘 까져야 한다.
꽃봉오리가 말했다.
바람을 잘 피워야 한다.
우듬지 이파리가 말했다.
잘 박아야 한다.
나무 밑동이 말했다.
잘 올라타야 한다.
장작이 말했다.
잘 까져야 한다.
시가 말했다.
시인이 위대할까요? 자연이 위대할까요? 시인도 이 지구별도 모두 '잘 해야 합니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삶을 위하여.
고정과 회전
들어올 때는 국밥집하고 순댓국집이 같은 식당인 줄 몰랐지? 자네 내외처럼 식당 앞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많어. 이 문으로는 소머리국밥 먹겠다고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저쪽 문으로는 순대가 땡긴다고 돼지 꼬랑지처럼 꼬부라져서 들어오지. 처음엔 병천순대집이었지. 국밥집에 세를 줬는데 파리만 날리다가 나가버렸어. 머리 잘 돌아가는 내가 벽을 터버렸지. 지 먹을 것 따라서 따로 들어왔다가 멋쩍게 한 탁자에 앉는 사람들 많어.
그만 좀 웃어. 에어컨 한대 갖고 당최 시원해야지. 쓰레기장에서 벽걸이 선풍기를 주워왔는데 회전이 안되는 거여. 며칠 뒤 한대를 또 주웠왔는데 요번엔 고정이 안돼. 그래 메뉴판 옆에 나린히 걸어놓고 명찰을 붙여줬지. 왼쪽 놈은 "회전이 안돼돼요." 오른쪽 것은 "고정이 안돼요." 생각하봐. 인생도 회전과 고정, 아니겄어. 멧돼지처럼 고정 못하고 돌진하다가 잘못되는 꼴 많잖어. 또 잔머리만 굴리다가 순대 속같이 잡스러워지는 거 아니겄어. 저 선풍기 때문에 손님이 늘었어. 하나만 걸려 있으면 고장난 선풍기지만, 둘이 붙어 있으니께 친구 같고 부부 같잖어. 동서나 남북이니 하는 것도 서로 끄덕끄덕,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을 한통속으로 섞으면서 살아야지. 우리 부부도 녀석들 때문에 별명이 생겼어. 내가 회전댁이고 우리 집 양반이 정지아저씨. 아저씨가 오토바이광(狂)이거든, 그저 돌진이여. 나야 얼굴 예브고 몸매 좋아서 쟁반 이고 나가면 사내들 눈알이 팽팽 돌아가지. 귀가 밝아서 눈알 돌아가는 소리까지 다 들려.
선풍기 밑에 나란히 서봐. 기념사진 하나 박아줄게. 고장난 선풍기도 저렇게 짝이 있는 거여. 둘이 끄덕끄덕 잘 살어. 메뉴 하나 양보 못하고 다른 문짝으로 들락거리지 말고 고정과 회전이 연애고, 정치 경제고, 세상 모든 책이여. 근데 안식구가 쎅시하게 생긴 게 고정이 잘 안되겄네. 국밥 좀 많이 잡숴야겄어. 나갈 때 갈비하고 등뼈 좀 끊어가. 정지버튼이 안 먹히는 바가 있어야 사내답지. 그만 좀 웃으라니께.
'시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라고 말하지만, 이 시집 속의 시들이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힌 시들이다.' 신경림 선생님의 말씀이 모든 말을 대산합니다.
색동 시월
미용실에 들렀는데 목수 여편네가 염장을 지르데.
자기 신랑은 거시기가 없는 줄 알았다고,
종일 먹줄 퉁기다 오줌 누곤 했으니 거시기까지 몽땅 새카메서
처음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거시길 뒤적거렸다고.
그랬더니 시커먼 숲에서 망치가 튀어나와 지금까지 기절시키고 있다고.
지는 처음부터 까본 년이라고, 그게 이십년 넘게 쉰내 풍기는 과부한테 할 소리여.
머리 말던 정육점 마누라가 자기는 첫날 더 놀랐다고
호들갑 떨더라고, 거시기에 피딱지가 잔뜩 엉겨붙어 있더라나.
어데서 처냐를 보고 와서는 자기를 덤으로 겸상시키는줄 알았대.
하루 종일 소 돼지 잡느라 피 묻은 속옷도 갈아입지 못했다고
곰처럼 웃더라나. 자기는 아직도 거시기에 피 칠갑을 하는 처녀라며
찡긋대더라고, 그게 없는 년한테 씨부렁댈 소리냐고.
근데, 동생은 밤늦게까지 백묵 잡을 테니까 거시기도 하얗겠다.
단골집 주인은 백태 무성한 서글픔을 내 술잔에 들이붓는것이었다.
모르는 소리 마요. 분필이 흰색만 있는 게 아니에요.
노랑도 있고 파랑도 있고 빨강도 있어요.
그려, 몰랐네. 색시는 좋겠다. 색동자지하고 놀아서,
술잔이 두둥실 떠오르는 색동 시월, 마지막 밤이었다.
거시기 자지는 변화무쌍 하였더라. 처음엔 소박한 고추였고 이내 줄기, 막대기, 뿌리로 자리를 잡았다. 쑥대와 호박씨,잠자리의 가벼움으로 스며들다가 곧 방망이, 봉, 채찍처럼 힘을 얻었다. 막대사탕, 소시지, 꼬치, 핫도그로 한숨 돌리고 허기를 채우고, 막대와 몽둥이 , 덩굴로 한뼘 더 성장하였다. 지팡이, 쑥대머리, 도끼자루와 같은 굳건함을 지니며 먹고물건, 줄기, 막대기, 뿌리, 쑥대,호박씨, 잠자리, 소시지, 봉, 채찍, 방망이, 꼬치, 핫도그, 막대, 몽둥이,덩굴, 지팡이, 쑥대머리, 도끼자루, 막대사탕, 장대, 빗자루, 흙수저로 일상에 스며들고 마침내 대포와 같은 거대함을 갖우었다. 그러나 그모든 이름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고래가 되었고, .거시기가 궁에 들어가 여주인을 만나야 이 지구별이 아가들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겠지요. 거시기가 양초와 고무줄의 뒷 모습을 보일지라도요. 이거이 거시기의 삶의 여정입니다.
단추를 채우며
남자 옷은 오른쪽 옷섶에 단추가 달려 있다 여자 옷은 반대로 오른쪽 옷섶에 단춧구멍이 파여 있다 누구는 좌우뇌의 발달 차이 때문이라 했다 누구는 하인이 채워주기 쉽도록 귀부인의 단추가 옮겨갔다고 했다. 모래밭에서 단추 찾듯 동서양 복식발달사를 뒤적였다 동서고금의 민화와 동굴벽화도 살펴보았다 뒤죽박죽이었다
칼 친 병사와 말달리는 전사를 보고야 알았따 젖 물리는 여인네의 눈물 젖은 단추를 만나고야 무릎을 쳤다 남자는 왼 허리에 찬 긴 칼을 뽑기 위해, 여자는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쉽도록 단추를 매단 것이었다 내 수컷이 단추처럼 작아졌다 내 단춧구멍은 죽임의 묘혈, 여자 것은 살림의 숨구멍이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단추, 너무 커서 테두리만 산마루에 걸쳤다 왼쪽 옷섶에 낮달이 떠 있다 아득히 멀지만, 별의 단춧구멍도 수없이 오른편에 뚫려 있으리라 초록 물방울 단추에서 밤하늘을 우러른다 밤낮으로 젖을 물리느라 옷섶 여민 적 없는 은하수, 저 포대기 젖 마를 일 없으리라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빗방울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땅속 어둠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최선을 다한 헐떡거림과 최선을 다한 자신의 꼭짓점을 최선을 다해 핥고 있는 수사자의 빨간 혀가 떠올랐습니다. 최선을 다해 흰 살갗은 내보이는 종이와 최선을 다해 구겨졌다가 최선을 다해 뼈마디를 맞추는 종이를 바라봅니다. 종이의 모서리에 뿔을 들이밉니다."(이정록)
그런 최선을 다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들을 곧 만나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 이게 마지막 버스지?
- 한대 더 남았슈.
- 손님도 없는데 뭣하러 증차는 했댜?
- 다들 마지막 버스만 기다리잖유.
- 무슨 말이야? 효도관광 버슨가?
- 막버스 있잖아유, 영구버스리고.
- 그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만 살짝 귀뜸해줘. 아예, 그 버스를 영구적으로 끌든지.
- 아이고 지가 졌슈.
- 화투판이든 윷판이든 지면 죽었다고 하는 겨. 자네가 먼저 죽어.
- 알았슈, 지가 영구버스도 몰게유. 본래 지가 호랑이띠가 아니라 사자띠유.
- 사자띠도 있남?
- 저승사자 말이유.
- 싱겁긴. 그나저나 두 팔 다 같은 날 태어났는데 왜 자꾸 왼팔만 저리댜?
- 왼팔이 부처를 모신거쥬.
- 뭔 말이랴?
- 저리다면서유? 이제 절도 한채 모셨고만유. 다음엔 승복 입고 올게유.
- 예쁘게 하고 와. 자네가 내 마지막 남자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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