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온 집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나희덕 시인의 두고온 집, 그 집은 무엇을 말하는지요? 집이 추우면 시인도 추워진다고, 시간과 거리에 의해 소원해진 존재, 그 존재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그리움. 그리고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결정적 순간
일찍이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이나 빗줄기에 소리를 내는 법, 그리고 가을 햇빛에 아름답게 물드는 법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이파리의 일생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는 낙법에 달려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잎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람에 불려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우연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수십 마일 이상 날아가 고요히 내려앉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려면 우선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바람이 몸을 들어올리는 순간 바람의 용적과 회전속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팔랑팔랑 허공을 떠돌다 강물 위에 내려앉는 낙엽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마지막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한방울의 비가 물 위에 희미한 파문을 일으키거나 별똥별이 하늘에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것도 다르지 않다 죽음이 입을 열어 하나의 몸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중요하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 벌써 절반이 넘는 이파리들이 나무를 떠났다 그들은 떨어진 게 아니라 날아간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처럼 보여도 이파리에게는 오직 한순간이 주어질 뿐이다 허공에 묘비명을 쓰며 날아오르는 한순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경험하는 일상과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는 너에게, 중대한 그 변화의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불확실한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변곡점과 전환점, 그 결정인 순간들에서 삶의 주인공인 너, 너의 의지와 목적, 운명아, 어디 한판 벌려 신명나게 놀아보자구나. 얼쑤! 오늘은 바람을 타고 떠나는 여행의 주인공은 이파리가 아닌 꽃씨랍니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수줍은 듯 머리카락이 보일듯 말듯, 눈썹이 보일듯 말듯 하더니, 연두색 나비들이 나무들 수액을 깊이 빨아 자라고 있는 봄, 쪼옥 쪽 빨고 쭈욱 쭉 자라다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또 멋진 비행을 해다오.너는 그런 멋진 사람이란다.
한 손에 무화과를 들고
그가 내게로 걸어왔을 때
무화과는 금방이라도 쪼개질 것처럼 보였다
초가을 저녁 이만한 향기는 드물어서
말없이 무화과를 받아들었다
실타래 모양의 속꽃들,
붉게 곤두선 혀들은 뭐라고 했던가
부르튼 입술에서 한없이 풀려나오는
사랑의 말들
뭉클뭉클 흘러드는 이 말을
어찌 곷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내 속에서 누군가 중얼거린다
눈부신 열매들이란 좀 멀리 있는 편이 좋다고
그러나 한 손에 무화과를 들고
그가 천천히 걸어왔을 때
무화과는 이미 쪼개져 있었다
태초부터 그 입술은 나를 향해 열려 있었다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기원에 대한 갈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그늘 에 앉아 기다린다. 또 다른 나를."
시인이여, 2024년 새 봄에도 또 다른 나를 봄그늘에 앉아 기다리고 있지요. 저도 2024년 4월의 봄, 새봄, 봄그늘과 봄햇살에 앉아 또 다른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바려두지 않고(들뢰즈) 오늘 새 봄을 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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