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book)/창비시선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창비시선 204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4. 26.
728x90
반응형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더퍼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개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 떠매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해남 들판 끝에 지는 노을, 그 노을이 시인을 찾아왔군요. 노을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가치, 그 순간을 통해 일상의 번잡함을 넘어 자기 성찰과 내적 치유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숟가락

 

  가루 커피를 타먀 무심히 수저통에서 제일 작은 것이라고 뽑아들어 커피를 젖고 있는데 가만 보니 아이 밥숟가락이다 그 숟가락으로 일부러 않던 버릇처럼 커피를 홀짝 떠 삼킨다

  단가 쓴가

  가슴이 뻐근하다

 

  빈집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발치에 와 있는 햇빛

  커피 한잔 주고 싶다

 

숟가락에 커피 홀짝 떠 삼킨다. 그러나 외로움일까 그리움일까 그 달달한 쓰디쓴  맛을 느끼지 전에 가슴부터 뻐근해질까 발치에 와 있는 햇빛과 커피 한잔 소소한 삶의 깊이를 나눌 수 있을까

 

 

빗소리

 

새벽녘에 빗소리 들렸다

부스럭대며 일어나 베란다에 나간다

비 들이치지 않을 만큼

바깥창 기울여 닫고

뒤창에 가 또 닫고 다시

들어와 문 닫고 앉았다

빗소리는 멀어졌다

앉아 엊그제 소란스레 피었던

철쭉분의 꽃들 다 어디 갔나

뒤늦게 생각한다

손바닥을 펴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슴께를 만져보기도 한다

 

베란다에 내가 잠깐 신었던

낡은 신 한 켤레가

흩어져서 뒹굴고 있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인, 그 소소함에서 삶을 성찰하고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