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에 대한 나의 이해
대파를 샀다. 중파도 쪽파도 재래종 파도 있었지만 대파를 샀다. 굵고 파랗다. 단단하고 하얗다. 맵고 끈적끈적하다. 대파다. 흙을 털고 씻었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큰 칼을 들고 대파를 썰 차례다. 억울하면 슬픈 일을 생각하면 좋다.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대파니까. 시장바구니에 삐죽 솟아오른 것이 대파였다. 설렁탕도 골뱅이도 없이 대파를 씹는다. 미끈거리고 아리다. 썰어서 그릇에 담는다. 대파여서 뿌듯하다. 종아리 같은 대파였으니까. 파밭의 푸른 기둥이었으니까. 뿌리를 화분에 심으면 솟아오르는 대파니까. 허공에 칼처럼 한번 휘둘렀으니까. 대파하고 파꽃이 피고 지면 알게 될까. 대파를, 뜨거운 찌개에 올려 숨 죽인 대파의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까. 대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2016년에 출간된 시집은 2024년을 예언하거나 8년 뒤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일을 짐작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김치찌개나 따로국밥에 쑹쑹 썬 대파를 흩어 넣고, 뜨그운 국물에 숨죽인 대파를 푸짐하게 얹어서 후루룩 후루룩 먹는 일에 대파 한 단 가격을 걱정할 겨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언제 대파를 사본 적이 있었던가요. 대파(大芭)로 대파(大破0될지 말입니다. 대파를 쑹쑹 썰어 그 위에 띄워놓고 숨을 고른 대구 따로국밥에 막걸리도 좋고 금복주도 좋습니다. 한병 멋들어지게 마시며 보내고 싶은 밤입니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등 한가운데 종기가 났다. 처음엔 근육통인 줄 알았다. 누워 자는데 뭔가 괴는 느낌이 났다. 약국에 가서 아직도 고약을 파나요, 물었다. 말하고 나서 이상했다. 아직도? 오랜만이다. 종기, 집에 돌아와 급한 마음에 뜯었는데 문제는 고약이 아니다. 팔이 닿치 않았다. 오른팔 왼팔 오른팔 왼팔. 어깨로 허리로 옆구리로 팔을 넘겼으나 종기에 닿지 않았다. 잘 붙일 수가 없었다. 환부를 두고 팔을 쭉쭉 뻗자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팔을 거두고 옆집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없었다. 바자회에 갔단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는 것이니 좀 참기로 하자. 그러고 보니 조금 전보다 더 쑤쎴다. 거울 앞에 등을 비춰보며 다시 섰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팔을 돌려 뻗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얼추 붙일 수가 있었다. 팔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한쪽 눈을 감으니 코앞이 바로 보이는 것처럼 초점이 맞았다. 고약 하나를 붙이고 안심했다. 이제 곧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 우는 아이를 업었는데 조그만 손가락으로 고약을 간단히 떼어버리고 종기를 후벼팠다.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휘휘 둘러본다. 더 잘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봤던 것들이 나를 비웃었다, 날마다 곪아 터지는 것은 종기가 아니다.
시인은 등에 난 종기로 인한 육체적 불편함에서 출발하여, 고약을 붙이려는 과정에서 겪는 고군분투 그리고 무력감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쪽 눈을 감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일상의 다양한 어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변회된 관점이 우리에게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내 죄가 나를 먹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주말이라 두 아이를 데리고 나섰어요. 부케를 들고 있는 예쁜 신부를 보고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고 음식을 마구 집어 먹었어요. 아이들을 단속하느라 뒤늦게 찾은 데스크에는 사람이 없어서 축의금도 전달하지 못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허브차를 한상자 샀는데 이 축하 선물을 언제 어떻게 전해줄지.
식장을 나와 걷는데 광화문 거리에 노란 리본이 물결쳤어요. 아이들은 멈춰 서서 종이 위에 배를 그렸지요. 영문도 모른 채 삐뚤삐뚤 글자를 썼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추모 엽서를 매단 줄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어요. 리본도 바람도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고 짧은 순간 후드득 지고 말 것입니다. 물속의 어둠은 상상할 수 없고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축하는 이어지고 또 언젠가는 예고 없는 죽음이 우리를 추격하겠지요.
주먹이 있고 빗자루가 있고 혁대가 있고 한바가지 물이 있지요. 그게 몸을 향해 날아왔어요. 심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가방을 메고 뛰쳐나왔다가 도로 들어갔어요. 흔한 해프닝이고 눈물범벅이고 말없이 화해되는 유년시절의 일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맞는 일은 없는데 주먹은 여기저기에 참 많습니다. 빈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내가 모른 척 방치한 것들입니다.
내가 지워지는 날들이 있어요. 내 죄가 나를 먹는 그런 날들. 다 먹힌 것 같은데 내일의 침묵 속에서 내가 다시 튀어나오겠지요.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내가 돌아갈 집은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많은 생명이 어이없는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광화문에서는 사고의 진실을 밝히고 사고의 책임자들을 처벌하라는 유가족의 절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먹빵을 찍으며 유가족을 조롱하는 무례한 행태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고 사회를 혼란하게 하냐"며 그저 운이 나빳고 재수가 없는 죽을만 하여 죽었다고 비웃으며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6년 뒤, 이태원 참사 또한 비슷한 맥락의 비극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희생된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비극적 사건들을 성실히 일하고 공부하지 않고 국적 불명의 파티에 참석한 불량품을 자식으로 둔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며, 그만한 일로 책임질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걸 잊자고 합니다. 그럴수록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비극적 참사에 귀 기울이고 내 죄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이제 더 이상 어이없는 희생을 겪지 않도록,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겠지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3연)
자라다가 만 손톱
가는머리
더이상 살찌지 않는 몸
나도 나를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원 계단에 술 취해 쓰러져 자는 남자의
검은 외투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조용하게 잠을 자고
살을 부비고
새해를 낳아주고 싶다
버석버석 일어나 길고 긴 하품을 하고 싶다
향긋한 입속에서 태어날 내 새끼들
평범하고 소소한 순간 그리고 그런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작은 순간들에서 새로운 시작과 재탄생을 느낄 수 있는 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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