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하게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봄비 내리는 밤 복숭아꽃(桃花, 도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도화주에 취하고 싶은 4월의 봄입니다.
* 와유(臥遊):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臥遊山水(와유산수)는 옛 선비들이 방 안에 산수화를 걸어 놓고 누워서 상상 속의 절경 유람을 즐겼던 것을 뜻합니다.
이 별의 재규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나하고 나 사이에 늙고 엉뚱한 종족들이 있지 내 별로 놀러 오는 나들 나들 때문에 그 종족들은 불편하다고 불평하며 불안했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사랑했지 난 종드는 게 특기니까 하루가 영원 같고 영원이 하루 같은 무협 판타지 같은 날들이었어 난 그날들을 CD로 구웠지 구워진 CD속에서 난 무릎이 아팠어 너무 많은 감정을 과소비하고 게다가 너무 많은 눈물을 삭제했으니까 수만년 전부터 이 별은 아팠어 늙고 엉뚱한 종족들은 이 별의 종말을 전지구적으로 살포하면서 우리 종족의 언어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서둘러 이별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리 종족의 위대함은 휴지통이라는 아이콘에 있지 '복원'이란 단추를 내장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별을 이 별로 굽거나 이별을 이별로 굽는 따위의 일은 우리 종족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거지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을 받는 방법은 선택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 멋지지? 이게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이란 엉터리 판타지 같은 이 시에 대한 키워드야, 친절하지?
안유미 시인은 "복원"을 중심으로 물리적, 정서적, 사회적 파괴 뒤에 오는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재앙과 파괴가 일상이 된 이 지구별, 인간이나 사화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빅토르 프랑클의 인용을 통해 고통을 받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으며,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반응하고 해석하느냐가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 빅토르 프랑클: 오스트리아의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삶이 의미가 있는지 묻는 대신, 매 순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 자신이다.'
뉴타운 천국
저녁을 훔친 자는 망루에서 펄럭거리는 깃발에 피를 퍼부었고, 권력과 자본의 화친은 미친 화마를 불러왔다
북적이는 시장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지혜롭게 늙어 가던 포도나무는 철거용역들이 함부로 휘갈긴 빨강 래커 스프레이 해골들만 득시글득시글거리는 철거촌에서 포클레인에 찍혀 죽었다
한 번 태어났지만 돈이 없으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어야 하는 세상
저녁을 훔친 자들만의 장밋빛 청사진
뉴타운천국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내 집 주니 셋집 주네?
풀 풀 풀 정처도 없이
뿔 뿔 뿔 정체도 없이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느닷없이 왼손을 잘리고 남은 생을 오른손잡이로 살아가야 하는 왼손잡이처럼, 자신의 뿌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해 온 철거민과 전국철거연합회 회원 30명이 적정 보상비를 요구하며 철거용역과 경찰과 대차하였다.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압으로 인하여 경찰특공대원 1명을 포함하여 6명의 국민(시민)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당한 대참사였습니다.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경찰과 시민(국민)을 화마에 희생시키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경찰과 유사한 복장과 무장을 하고 폭력을 일삼았던 철거용역은 그 날 전까지 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해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착과 철거용역은 철저히 합동작전을 펼쳤습니다. 재개발 공사는 그 날 이후 7년간 방치되다가 지난 2016년에 첫 삽을 떴습니다. 당시 상가 세입자 등 철거민들과 상인들은 적절한 보상, 실질적인 이주 대책 마련, 재개발 과정의 투명성, 강제 철거 반대를 주장했습니다.
용산 4구역의 대참사가 끝나고 여전히 사람들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세입자만의 문제를 넘어 서고 있습니다. "달랑 집 한 채 가지고 있지 현금이나 유동성 자금이 없는데 세금을 그렇기 많이 때리면 집을 팔라는 이야기인가"라고 정권 퇴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달랑 집 한 채 가지고 월세 받고 사는데 재개발이라고 망무가내로 나가라면 어쩌냐"라는 사람들을 화영에 처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PF부실, 가계빚과 나라빚 천정부지.....그런데 재개발과 부동산 개발의 황금시대라고 합니다. 기간이 걸려도 대화와 소통,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묘안과 묘책이.....
합체
하루종일 분홍눈이 내렸다
세로도 가로도 없는 그 공간을 '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우주'라는 말을 발견했다
그후 우리는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에 착륙했고
중력은 희박했고 궤도를 이탈한 계절은 랜덤으로 찾아왔다
어제는 겨울 오늘은 여름 낮에는 가을 밤에는 봄
우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웠고 우리는 은밀했다
이상했지만 세계는 완벽했고 중력은 충분히 희박했다
검색창 밖으론 하루종일 푹푹 분홍눈이 내렸고
하루종일 우주선처럼 떠다녔다
사랑과 합체한 사랑은, 그리고 또 우리는
그후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의 거북무덤엔 다음처럼 기록되었다
사랑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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