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홑씨 바람 타듯이, 생활을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집ㅇ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잃는 것 얻는 것에 별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받지 못하는 시 한편도 희고 붉은 피를 섞인 눈물로 쓰인 줄 아는 사람,
커다란 갓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서 받아내는 사람,
자유로워지려고 덜 가지려 애쓰는 사람, 맨살에서 늘 시골집 저녁 연기 내음이 나는 사람,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야말로 연인삼을 만하다 할지어다.
1941년 세상과 인연을 맺은 유안진, 이제 팔십대 어르신, <봄비 한 주머니>는 2000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으니 선생님이 60에 세상에 내놓은 시집, 선생님, 이런 자격을 가진 분을 연인 삼으셨는지요. 정말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네요. 영과 마음과 몸의 평정심을 쉽게 잃지 안으면서도 모름지기 이런 사람인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적
진실은 없었다
좋음만도 아니었다 아름다움만도 아니었다 깻끗함만은 더욱 아니었다
아닌 것이 더 많아 알맞게 섞어지고 잘도 발효되어
향기는 높고 감칠맛도 제대로인 피와 살도 되었더라
친구여 연인이여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도 떫고 아린
우정도 사랑도 인생이라는 불모의 땅에 태어나준
꽃이여
서로의 축복이여
기적은 없었다 살아온 모두가 기적이었으니까.
어제에 잡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후회스러운 어제라도. 내일을 맹목적으로 쫓으려 하지 않습니다, 불안한 내일이라도. 오늘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도 떫고 아린' 하루하루, 불모의 미지의 내일을 향해서 오늘도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감격하고 감동하며 뚜벅뚜벅 앞으로 앞으로 그리고 가끔 하늘을 바라보고 가끔 먼 산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나누다 다시 뚜벅뚜벅.
변명
의문조차 희열이던 젊음은 언제였나
이름으로 가득 찬 세상처럼 꿈으로 가득 찼던 가슴에는
무모하고 성급하여 저질러온
잘못 부끄러운 수치 후회막급.....들로
어질러진 가랑잎 천지
구렁에서 나오느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듯
수치를 지우느라 더 큰 수치를 만들었으라
수치의 힘으로 살아온 셈이지
그러나 그러나 낯 뜨거운 수치가 팥밥처럼 섞여 있어야
젊음은 젊음다워지고 노년도 겸허로 터얼 비어질 듯
능금불 소년도 은발의 신사로 우아해질 듯
암노루 울음도 산울림이 되고
갈매기 우짖음도 바다울음 될 듯
역사가 역사다워지고 인생도 장엄한 인생이 되는 듯
때얼룩이 덧때가 묻어서 때깔에 윤이 나고
때결로 무늬가 어리워지듯
부끄러움이여
모름지기 밤이 대낮보다 어둠이 빛보다 소중한 것이다.
늙어 가며 수치와 후회막급이 아니라 뻔뻔스러움이나 겸허의 자리에 안아무인 후안무치하며 젊으니까 수치지 하며 살지말아야지. 부끄러워할 줄 알며 살아야지.
인간적인 신
가장 성스러운 신은 가장 인간적인 신인가 부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다말과 나합과 룻과 밧세바 같은 동족 또는 이방 민족의 흠 있는 女祖(여조)들의 손자이시니까.
다말은 야곱의 아들 중 유다의 맏자부로서, 남편이 죽자 당시 풍속대로 시동생과 결혼했으나 다시 과부가 되어, 셋이라는 막내 시동생과 결혼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저주받은 여자라 하여, 셋째아들 셋과의 결혼을 미루기만 했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여행길에 치진 시부를 유혹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여리고성의 기년 나합은, 애굽에서 나오는 유대민족의 첩자를 숨겨 피신시켜주고 유대족의 점령을 도운 이방인이었다
모압 여인 룻도 남편 길욘이 죽자, 유태족인 시어머니의 나라로 가서, 이삭줍기로써 시모를 극진히 봉양했다, 감동받은 시모 나오미는 한 꾀를 내어 보아스의 잠자리로 몰래 들어가서 그의 아내가 될 것을 권했고, 시모의 권유를 따라 룻은 보아스에게서 오벳을 나아 시모 품에 안겨주었으니, 훗날 다윗왕의 조부가 되었다.
유부녀 밧세바는, 벌건 대낮에 왕궁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에서 목요하다가, 다윗왕의 눈에 뜨이 불려가 임신을 했고, 왕은 그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보내어 전사시켰다. 그래서 합법적인 왕비가 되어 솔로몬을 낳았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의 가계에는 이들 女祖(여조)들이 있었던 그대로 등장한다. 그래서 동족이든 이방인이든 죄지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실 가장 인간적인 신일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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