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book)/창비시선

《 사이 》 이시영, 창비시선 142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4. 19.
728x90
반응형

어린 동화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아이가

젊은 엄마의 손을 이끌고 대낮의 쭈쭈바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느님이 뒤에서 방긋 웃다가 그 아이의 고추를 탱탱히 곧추세우자

젊은 엄마의 얼굴이 채양 사이로 빨갛게 달아 오른다

 

 

구례장에서

 

아침부터 검푸른 장대비가 줄기차게 오신다

천막 속에서 값싼 메리야스전을 걷다가

온 땅과 하늘을 장엄한 두 팔로 들었다 놓는 빗줄기를

하염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중년여인의 옆 얼굴이 빨갛다

 

 

오늘 같은 날

 

일요일 낮 신촌역 앞 마을버스 1번 안

등산복 차림의 화사한 할머니 두 분이

젊은 운전기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시우 젊은 양반! 오늘같이 젊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시구려.

 그래야 산천도 다 환해진다우"

 

오늘같이 젊은 날, 마음껏 사랑하지요. 

 

생업

 

통태 싸유.....

물오징어 싸유....

꽁치 싸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는 그를 알 것만 같다

나는 그를 알 것만 같다

 

갈치 싸유.....

자반 고등어 싸유.....

이면수 싸유....

 

나른한 한낮이면 어김없이 골목 끝에 나타나

바다 밑처럼 혼곤한 주부들의 꿈길을

웃음으로 환히 뒤흔들고 가는

 

  웃으면 복이온다고 하니 웃으며 살아요. 왜 메밀묵 장사는 그 긴긴 겨울밤을 비워둘까요. 그 야심한 밤 출출한 청춘들을 위한 웃음을 나눠주시길.....

 

 

聖者처럼

 

아몬드에서 한잔 하다가 지상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 창비 화장실을 가다가 그 오른쪽으로 환하게 불켜진 집, VIP 양복점의, 다리를 약간 저는 주인 겸 1급 재단사가 커다란 가위를 들고, 한쩍 귓등엔 하얀 백묵을 꽂은 채, 성자처럼 엎드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나 거기 서서 오래오래 바라보곤 하였다.

 

 

천주교 용산교회

 

천주교 용산교회 종지기 할아버지에겐 어린 손자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녁 6시, 긴 동아줄에 할아버지와 나어린 손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혼신의 힘으로 치는 종소리엔 이 세상의 제일 밝고 맑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어 미사중인 신부들도 잠시 고개를 숙이고 그 소리에 깊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어요.

 

 아기예수를 위해 경배를 보내며 가브리엘 천사가 이 지구별 곳곳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해 지는 노을녘의 풍경도 그렇지만 우주의 새벽 열림의 순간으 내게 있어서 늘 경이의 순간이며 시적 계시의 순간이도 하다. 그것을 기록하고 싶다! 아니 '시'가 나를 통과하여, 나를 뛰어넘어 저를 써내려갔으면 한다. 바라옵건대 내 눈의 심층이 조금 더 열려 지금은 내게 안 보이는 세계가 내일이면 활짝 열렸으면 한다. 그리고 언어여, 소리와 빛깔말고도 제발 그  그늘 같은 것도 좀 거느려다오. 장대한 폭포는 통쾌히 한번 쏟아지고 난 뒤에도 만사의 적요 속에 그 은은한 울림의 여운을 끝까지 남길 줄 안다."

 

 한 평생 이런 글을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