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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니들의 시간》 김해자, 창비시선 494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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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려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뜅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퀴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봉고차 장수,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두부 두모, 알콩, 청국장,연시,고구마, 고들빼기, 씀바귀, 코딱지풀, 흰 부추꽃, 백로, 눈 위에 쌓여가는 눈.....당신의 말이 떨어지 때마다 나는 웃는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월식

 

  달이 참말로 안 뵈네

  뭔 일로 멀쩡하던  보름달이 갑재기 안 보인다

  사람만 그런 게 아녀

  해도 달도 사연이 많어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밤에 강으로 갔는디 컴컴항게 암

것도 뵈지 않으니께 여가 거근지 거가 여근지 모르겠더라

고 일단은 들어갔어. 근디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떠드라

고 막 뜨니께 으디를 붙잡을 디도 읎구, 죽으러 드갔는디 죽

어야 하는 건지 살아야 되는 건지, 이 꼴로 으디를 가나, 내

맴만 젖었다니께.

 

  그 훤하던 게 으디 처박힜나

  물에 빠졌으니까 산에 맥혔으까

  달이 한창씩이나 안 나오네

  그래도 다 가리진 못허고 둥그런 테두리가 보이는디

  다 묻혀도 나 달이다, 허고 있잖여

  아주 죽은 게 아녀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

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 디 죽을 맛이더라

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

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따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했어. 아프다 아프

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웃으면 곤한하겠지요, 그런데 웃음보가 터져 버렸습니다.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넨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삶의 시작이 죽음이 시작인 이 지구별 생명들의 슬픈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생이별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면, 죽은 이들의 억울함과 못 다한 삶을 위안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살기 힘들고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인내의 한계와 고통 속에서도 무심히 돌아가는 세상이 원망스러운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을 살다보면 "야아 살아났네, 살아 났어"하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1

2023년 8월 24일,

인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엘리뇨, 미래의 소년들이여,

너희 선조들은 핵물질을 열배 희석한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삼십만년 동안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라니냐, 아 냉철한 미래의 소녀들이여,

천이백오십 톤을 방류하면 지하수가 백이십오 톤 들어온단다

지하수를 열배 희석하면 천이백오십톤,

하루에 이천오백 톤 오염수를 바다에 투척하기 시작했다

삼십년간 이억 칠천만 톤이라니

 

너희가 살아갈 바다를 서서히 죽이기로 결심했다

어른들끼리

훔쳤다 너희들이 먹고 살 미래의 시간을

권력은 결정했다 집단자살의 길을

엘리뇨, 오 이럴 수가

 

2.

후쿠시마 원전 저장탱크에는 백삼십사만 톤의 오염수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천개가 차면

천개의 탱크를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들은 저희끼리 결정했다 돈이 적게 드는 길을

썩지 않는 핵연료와 철근과 콘크리트 찌거기가 녹아 있는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기로,

가장 값싼 길은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에게도 미래의 너희에게도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3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함으로써 누가 이익을 보는가

도쿄전력이다 일본이다 몇 사람뿐이다

누가 손해를 보는지, 오 라니냐, 너는 알겠지

지구상 모든 생명체와 바다와 하늘과 바람이지

아니지, 이익의 반대말은 손해가 아니라

바로 죽음이지

 

여기에 있는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십년 삼십년 육십년 백년 후에 올 너희의 목숨이지

미래의 너희 부모가 지금 우리의 자식들인 것처럼

바다와 땅과 공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땅과 바다와 사람은 한 몸으로 이어져 있기에

 

오, 엘리뇨, 따뜻한 바닷물 같은 소년이여, 

너희는 바다에서 헤엄치고 모래집을 지을 수 있을까

내가 만나지 못할 삼십년 후 소녀들이여, 미안하다

우리는 아직 이 죽음의 길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를 철회하라

지금이라도 멈춰라 죽음의 방류를